글
明
narre
2005. 1. 12. 15:35
오늘도 그날처럼 조금씩 비가 왔다.
지하철을 탈 때 까진 그렇지 않았는데, 잠실역을 나오니 톡톡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나더라. 버스 번호가 기억이 나질 않아 내 얄궂은 기억력을 탓하며 비슷해 보이는 버스에 물었지. 다보사 가는 버스냐고. 아저씨가 모른다 하시더라. 근데 알고보니 그 버스였어.
소주랑 과자를 사들고 한참을 기다려서 버스에 올랐어. 가는 동안 함께 했던 것들을 생각했는데, 잘 기억이 나질 않더라. 참 많았던 것 같은데. 기숙사에서 춤도 췄고, 독서 소모임도 잠깐 꾸렸고, 녹두의 어느 술집에서 칵테일을 종류별로 다 마셔 보겠노라고 했던 적도 있었지. (근데 그 술집 이름이 기억이 나질 않네.) 스쿼시도 같이 다녔고, 교양 수업도 함께 들었고... 또 많이 있었는데.
답답하더라. 앞에는 귀여운 아기가 자못 권태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데, 뚫어져라 그 눈을 응시해도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 것들이 있는거야. 느낌은 강렬하고 생생한데. 구체적인 형상이 비에 잔뜩 젖은 신문지 조각처럼 알아볼 수 없게 되어버린 그런 것들.
그렇게 답답함을 품에 잔뜩 안고 낑낑대며 버스에서 내렸어. 거기 어디 굴다리가 있었던 것 같은데 보이지 않더라. 그래서 사람을 붙잡고 여기 어디 절이 있지 않느냐고 물어봤더니 또 모른다네. 그땐 조금 당황했어. 버스 기사 아저씨도 모르고, 이 사람도 모르는 거면 혹시 그 절이 없어진 것 아닐까 싶었거든. 그럼 어쩌나. 그럼 나는 어디에 가서 절을 해야 하나. 어디에 가서 술을 부어야 하나.
먹먹하더라. 추적추적 비는 오는데 소주랑 과자랑 들고 흙길을 터벅터벅 걷고 있으려니. 그러다 봤어. 저기 너머 시커먼 두 구멍. 꼭 저 세상으로 이어질 것 같은 고요한 어둠구멍 두 개에 나는 얼마나 안심이 되던지...
절엔 들르지 않고 곧장 네가 뿌려진 곳으로 갔다. 1년전 그대로더라. 산천초목도 딱 그만큼만 자라 있더라. 그래뵈도 겨울엔 죽고 봄엔 다시 태어나 딱 그만큼인거겠지. 어째 변하고 변하는데 변하지 않는건지. 묵묵히 그 터를 보고 있으려니, 작년 생각이 참 많이 났어. 내가 그렇게 잡념없이 펑펑 울어본 적이 또 있었을까. 슬픔의 원형이 있다면 이런 것 아닐까하고 그때는 생각했다. 네 부재가 슬프고, 그 부재가 모두에게 이해받지 못함이 슬퍼서 나는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 헤치고 앞으로 나가 한 줌 하얀 가루로 화한 너를 봤을때, 나는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고 이승의 네 모든 흔적들이 재가 되어 하늘로 오를 때, 나는 쉽사리 그것들을 보낼 수가 없었다. 그때는 그렇게 모든 것들이 어찌할 수가 없었다.
터 앞에 묵묵히 서있으려니 생각이 너무 많아져, 나는 입을 열었다. 내 말이 조금이라도 너를 더듬을 수 있을까 해서 조용히 부르기도 하고, 의미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한 두 잔 술을 따라 그 터에 뿌렸는데, 생각해보니 네가 좋아했던 포도주나 위스키를 준비할걸 그랬다.(예전에 기숙사에서 와인을 사다 먹는데 코르크 마개 따는 것이 없어 결국 목 부분을 깨어서는 둘이서 그래도 좋아라 마시던 기억이 났다.)
터 근처엔 산이라 그런지 벌레가 참 많더라. 우습지만 혹시나 너인가 싶어 여기저기 무는 것을 매섭게 뿌리치지도 못했다. 절에 시주도 못했는데, 그걸로 시주한 샘 치기로 했다.
나오는 길엔 생각도 떨칠겸 절에 들러 염은 하지 못하고 조용히 절만 했다. 스무배를 넘어서니 부처님도 보이고 땀도 많이 흐르면서 점점 아무 생각이 없어지더라. 그래서 절을 나설 땐 편안했다. 기억나지 않는 것들 때문에 내내 답답했는데, 기억나는 것들 때문에 내내 슬펐는데, 절을 다 마치고 신발을 신는 순간, 저기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시원해지더라.
나는 사십구재의 마지막 날, 스님께서 오늘을 기점으로 모두 잊어야 네가 이승을 편히 떠날 수 있다고 하신 말씀에 너무 집착했나보다. 그때문에 애써 잊으려고 했고, 그러다 또 애써 기억하려 했다.
하지만 부처님 얼굴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더라. 그건 부러 잊을 필요도, 부러 기억할 필요도 없는 일이라고. 함께 했던 곳에 먼지처럼 눌러있다가, 내가 다가가 주저 앉으면 풀썩하고 뽀얗게 피어오르는 기억이 있다면 이렇게 한 번 찾아오면 될 일이다. 하지만 계절이 바뀌듯이 그런 곳들도 점차 사라져가고, 나의 기억 또한 사라져가고, 나 또한 사라져간다. 그때는 그대로 잊으면 될 일이다.
돌아오는 지하철에서,나는 음악을 들으며 얼핏설핏 잠이 들었는데 앞에 서 있던 아주머니들이 술 냄새가 난다고 쑥덕이더라. 친구랑 한잔 했는데 너무 핍박하지 말라 그러려다 귀찮아서 모른척했다. 오늘따라 능글 맞아져서는 미안하지도 않았다. 다시 잠에 빠져드는데 달이 생각나더라. 초저녁에, 미처 해가 지기전에 저 반대편에 솟아오르는 보름달 말이다. 항상 성급하다 생각했던 그 달. 하지만 네가 왜 明 인지, 해와달이라고 스스로 칭했는지 이제는 알 것만 같더라.
memo: 잠실역 8번 출구에서 30-5번 버스
지하철을 탈 때 까진 그렇지 않았는데, 잠실역을 나오니 톡톡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나더라. 버스 번호가 기억이 나질 않아 내 얄궂은 기억력을 탓하며 비슷해 보이는 버스에 물었지. 다보사 가는 버스냐고. 아저씨가 모른다 하시더라. 근데 알고보니 그 버스였어.
소주랑 과자를 사들고 한참을 기다려서 버스에 올랐어. 가는 동안 함께 했던 것들을 생각했는데, 잘 기억이 나질 않더라. 참 많았던 것 같은데. 기숙사에서 춤도 췄고, 독서 소모임도 잠깐 꾸렸고, 녹두의 어느 술집에서 칵테일을 종류별로 다 마셔 보겠노라고 했던 적도 있었지. (근데 그 술집 이름이 기억이 나질 않네.) 스쿼시도 같이 다녔고, 교양 수업도 함께 들었고... 또 많이 있었는데.
답답하더라. 앞에는 귀여운 아기가 자못 권태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데, 뚫어져라 그 눈을 응시해도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 것들이 있는거야. 느낌은 강렬하고 생생한데. 구체적인 형상이 비에 잔뜩 젖은 신문지 조각처럼 알아볼 수 없게 되어버린 그런 것들.
그렇게 답답함을 품에 잔뜩 안고 낑낑대며 버스에서 내렸어. 거기 어디 굴다리가 있었던 것 같은데 보이지 않더라. 그래서 사람을 붙잡고 여기 어디 절이 있지 않느냐고 물어봤더니 또 모른다네. 그땐 조금 당황했어. 버스 기사 아저씨도 모르고, 이 사람도 모르는 거면 혹시 그 절이 없어진 것 아닐까 싶었거든. 그럼 어쩌나. 그럼 나는 어디에 가서 절을 해야 하나. 어디에 가서 술을 부어야 하나.
먹먹하더라. 추적추적 비는 오는데 소주랑 과자랑 들고 흙길을 터벅터벅 걷고 있으려니. 그러다 봤어. 저기 너머 시커먼 두 구멍. 꼭 저 세상으로 이어질 것 같은 고요한 어둠구멍 두 개에 나는 얼마나 안심이 되던지...
절엔 들르지 않고 곧장 네가 뿌려진 곳으로 갔다. 1년전 그대로더라. 산천초목도 딱 그만큼만 자라 있더라. 그래뵈도 겨울엔 죽고 봄엔 다시 태어나 딱 그만큼인거겠지. 어째 변하고 변하는데 변하지 않는건지. 묵묵히 그 터를 보고 있으려니, 작년 생각이 참 많이 났어. 내가 그렇게 잡념없이 펑펑 울어본 적이 또 있었을까. 슬픔의 원형이 있다면 이런 것 아닐까하고 그때는 생각했다. 네 부재가 슬프고, 그 부재가 모두에게 이해받지 못함이 슬퍼서 나는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 헤치고 앞으로 나가 한 줌 하얀 가루로 화한 너를 봤을때, 나는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고 이승의 네 모든 흔적들이 재가 되어 하늘로 오를 때, 나는 쉽사리 그것들을 보낼 수가 없었다. 그때는 그렇게 모든 것들이 어찌할 수가 없었다.
터 앞에 묵묵히 서있으려니 생각이 너무 많아져, 나는 입을 열었다. 내 말이 조금이라도 너를 더듬을 수 있을까 해서 조용히 부르기도 하고, 의미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한 두 잔 술을 따라 그 터에 뿌렸는데, 생각해보니 네가 좋아했던 포도주나 위스키를 준비할걸 그랬다.(예전에 기숙사에서 와인을 사다 먹는데 코르크 마개 따는 것이 없어 결국 목 부분을 깨어서는 둘이서 그래도 좋아라 마시던 기억이 났다.)
터 근처엔 산이라 그런지 벌레가 참 많더라. 우습지만 혹시나 너인가 싶어 여기저기 무는 것을 매섭게 뿌리치지도 못했다. 절에 시주도 못했는데, 그걸로 시주한 샘 치기로 했다.
나오는 길엔 생각도 떨칠겸 절에 들러 염은 하지 못하고 조용히 절만 했다. 스무배를 넘어서니 부처님도 보이고 땀도 많이 흐르면서 점점 아무 생각이 없어지더라. 그래서 절을 나설 땐 편안했다. 기억나지 않는 것들 때문에 내내 답답했는데, 기억나는 것들 때문에 내내 슬펐는데, 절을 다 마치고 신발을 신는 순간, 저기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시원해지더라.
나는 사십구재의 마지막 날, 스님께서 오늘을 기점으로 모두 잊어야 네가 이승을 편히 떠날 수 있다고 하신 말씀에 너무 집착했나보다. 그때문에 애써 잊으려고 했고, 그러다 또 애써 기억하려 했다.
하지만 부처님 얼굴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더라. 그건 부러 잊을 필요도, 부러 기억할 필요도 없는 일이라고. 함께 했던 곳에 먼지처럼 눌러있다가, 내가 다가가 주저 앉으면 풀썩하고 뽀얗게 피어오르는 기억이 있다면 이렇게 한 번 찾아오면 될 일이다. 하지만 계절이 바뀌듯이 그런 곳들도 점차 사라져가고, 나의 기억 또한 사라져가고, 나 또한 사라져간다. 그때는 그대로 잊으면 될 일이다.
돌아오는 지하철에서,나는 음악을 들으며 얼핏설핏 잠이 들었는데 앞에 서 있던 아주머니들이 술 냄새가 난다고 쑥덕이더라. 친구랑 한잔 했는데 너무 핍박하지 말라 그러려다 귀찮아서 모른척했다. 오늘따라 능글 맞아져서는 미안하지도 않았다. 다시 잠에 빠져드는데 달이 생각나더라. 초저녁에, 미처 해가 지기전에 저 반대편에 솟아오르는 보름달 말이다. 항상 성급하다 생각했던 그 달. 하지만 네가 왜 明 인지, 해와달이라고 스스로 칭했는지 이제는 알 것만 같더라.
memo: 잠실역 8번 출구에서 30-5번 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