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개체성을 넘어선 사랑, 망각한 사랑
narre
2006. 3. 7. 15:32
사람들에게 종종 지적당하는
나의 불안해 하지 않고 안정적이며 여유있어 보이는 모습, 어느정도 자기애가 과잉되어 보이는 부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죽음 아래 홀로선 자로서의 고독, 누구도 대신 짊어질 수 없는 그 고독에서, 내 편안함은 나온다고 스스로는 생각해왔고, 생각한다. 분명 어떤 부분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과장이고, 타인에게 마음의 축을 선뜻 옮기지 못하는 두려움에서 온 것이지만, 근본적으로 여유와 안정은 죽음 앞에 선 자의 고독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그 고독을 인정한 후에야, 그 고독과 오래도록 긴 싸움을 한 후에야, 결코 끝이 나지 않는 그 싸움의 과정에서 스스로를 신뢰할 수 있는 부분이 생기는 것 같다.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는,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한 평생을 살면서, 두려움과 후회는 그저 시간낭비일 뿐이라는 절절한 깨달음. 어차피 봄철 단꿈같은 삶, 꿈에서 자유로운 만큼, 생에서 자유롭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때문에 나는 슬프고, 고통스럽고, 힘들어하면서도 이를 감싸안을 수 있는 생에 대한 감사와 여유만은 늘 지킬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바로 그 죽음 앞의 고독 때문에, 나는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사랑하지 않는 자신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 허허로운 삶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이 된 것은 아닌지 걱정한다. 생의 한가운데 홀로 던져진 외로움, 그 절절한 개체성은 그걸 넘어선 사랑을 갈구하게 했다. 연인 혹은 예술 혹은 이념 혹은 그 무언가에 대한 헌신적이고 열렬한 사랑이 없는 삶을 나는 아직은 수용할 수 없다.(바로 그 때문에 소위 '쿨한 연애'에 흥미를 못 느낀다.)
하지만 개체성을 '넘어선' 사랑이라는 이상은, 실제 현실에선 개체성을 '망각한' 사랑으로 드러나기 쉽상이다. 개체성을 망각한 사랑이 자기애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랑이라면, 개체성을 넘어선 사랑은 너/나의 구분됨이 무의미해지는 사랑이겠지. 때문에 이기적/이타적이라는 틀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그런 사랑. 그렇다면 죽음 앞에 홀로 서 있으나, 너/나의 구분없이 하나인 그런 사랑은 무엇일까. 연인간의 사랑에서는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
가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토마스를 생각한다.
오직 사랑을 위해, 천직이라 여겼던 의사라는 직위를 버리고 , 조국을 버리고, 프라하를 버리고, 최후엔 내면적 강함까지 버리고, 결국엔 테레사의 품에 안긴 한마리 작은 토끼가 되어 죽음을 맞이한 토마스.
슬픔이란 형식 속에 행복이란 내용을 채워넣은 사랑.
테레사는 언제나 토마스의 사랑을 그가 자신을 위해 무엇을 버릴 수 있는지를 통해 확인했지만, 그는 그것을 버림이라고 생각하지조차 않았을까.
내 삶의 우선순위는 사랑일 수 밖에 없다. 다만 내가 아직 사랑을 잘 모를 뿐.
(사랑 밖에 난 몰라. 근데 사랑도 잘 몰라. -_-)
나의 불안해 하지 않고 안정적이며 여유있어 보이는 모습, 어느정도 자기애가 과잉되어 보이는 부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죽음 아래 홀로선 자로서의 고독, 누구도 대신 짊어질 수 없는 그 고독에서, 내 편안함은 나온다고 스스로는 생각해왔고, 생각한다. 분명 어떤 부분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과장이고, 타인에게 마음의 축을 선뜻 옮기지 못하는 두려움에서 온 것이지만, 근본적으로 여유와 안정은 죽음 앞에 선 자의 고독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그 고독을 인정한 후에야, 그 고독과 오래도록 긴 싸움을 한 후에야, 결코 끝이 나지 않는 그 싸움의 과정에서 스스로를 신뢰할 수 있는 부분이 생기는 것 같다.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는,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한 평생을 살면서, 두려움과 후회는 그저 시간낭비일 뿐이라는 절절한 깨달음. 어차피 봄철 단꿈같은 삶, 꿈에서 자유로운 만큼, 생에서 자유롭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때문에 나는 슬프고, 고통스럽고, 힘들어하면서도 이를 감싸안을 수 있는 생에 대한 감사와 여유만은 늘 지킬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바로 그 죽음 앞의 고독 때문에, 나는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사랑하지 않는 자신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 허허로운 삶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이 된 것은 아닌지 걱정한다. 생의 한가운데 홀로 던져진 외로움, 그 절절한 개체성은 그걸 넘어선 사랑을 갈구하게 했다. 연인 혹은 예술 혹은 이념 혹은 그 무언가에 대한 헌신적이고 열렬한 사랑이 없는 삶을 나는 아직은 수용할 수 없다.(바로 그 때문에 소위 '쿨한 연애'에 흥미를 못 느낀다.)
하지만 개체성을 '넘어선' 사랑이라는 이상은, 실제 현실에선 개체성을 '망각한' 사랑으로 드러나기 쉽상이다. 개체성을 망각한 사랑이 자기애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랑이라면, 개체성을 넘어선 사랑은 너/나의 구분됨이 무의미해지는 사랑이겠지. 때문에 이기적/이타적이라는 틀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그런 사랑. 그렇다면 죽음 앞에 홀로 서 있으나, 너/나의 구분없이 하나인 그런 사랑은 무엇일까. 연인간의 사랑에서는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
가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토마스를 생각한다.
오직 사랑을 위해, 천직이라 여겼던 의사라는 직위를 버리고 , 조국을 버리고, 프라하를 버리고, 최후엔 내면적 강함까지 버리고, 결국엔 테레사의 품에 안긴 한마리 작은 토끼가 되어 죽음을 맞이한 토마스.
슬픔이란 형식 속에 행복이란 내용을 채워넣은 사랑.
테레사는 언제나 토마스의 사랑을 그가 자신을 위해 무엇을 버릴 수 있는지를 통해 확인했지만, 그는 그것을 버림이라고 생각하지조차 않았을까.
내 삶의 우선순위는 사랑일 수 밖에 없다. 다만 내가 아직 사랑을 잘 모를 뿐.
(사랑 밖에 난 몰라. 근데 사랑도 잘 몰라.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