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숲
큰 기대없이, 송일곤 감독의 작품이란 말에, 날도 덥고 해서, 그냥 봤는데,
오, 이거이 굉장히 재밌었다.
좋은 영화라거나 인상이 깊다거나 하는 감상이 아니라, 내내 긴장감을 놓지 않을 정도로 몰입해서 봤다.
글치, 스릴러가 이래야지, 하면서.
영화는 스릴러답게 복선도 많고, 논쟁이 되는 부분도 적당히 있고 한데, 뭐 이런 부분이야 우리의 지식인들이 척척 대답해줄테고, 개인적으로는 '숲'이라는 설정이 흥미로웠다.
얼마전에 본 '마법사들'도 그렇고, '거미숲'도 그렇고 모두 숲이 배경이다. 그것도 사람들이 쉽게 찾지 않은 깊디 깊은 숲이다. 건조하고 차가운 침엽수들로 가득한 이 겨울숲은, 한걸음 움직이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숲 전체로 울려퍼질 듯 조용하고, 그 소리에 응답하는 이 하나 없을만큼 고독하다. 철저하게 혼자인 곳, 시간 조차 움직이지 않을 그런 곳.
이 격리되고 고독한 숲에서는, 잊고있던 혹은 잊고싶었던 마음 깊숙한 곳의 오래된 기억(트라우마)까지 명징하게 살아난다. 거미숲의 강민은 어머니와 친구의 죽음을 떠올리고, 마법사들의 재성은 여자친구의 죽음을. 어쩌면 감독 그 자신과도 같은 이 숲은, 한 인간의 생애에 가장 강하게 영향을 주었을 어떤 사건, '죽음'을 그 울창한 나무들 안에 품고 있다.
그러면 이 두 영화가 비슷한 영화냐.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소재와 배경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두 영화는 그 죽음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확연히 다르다. 거미숲의 죽음이 망각과 부활을 거치면서, 다시 힘겹게 반복되며 방황하는 어떤 기억이라면(비록 마지막에 구원받는다곤 하지만), 마법사들의 죽음은 아프지만 담담히 회상되고, 하나의 강렬한 사건에서 서서히 일상의 한 부분이 되어가는 기억이다. 전자가 죽어도 잊지 못할 트라우마 속에서 헤메는 이에 관한 이야기라면, 후자는 이제 그 기억과 화해하고자하는 이에 관한 이야기다. 그래서 하나는 스릴러가 되었고, 하나는 드라마(?)가 되었다.
거미숲(2004)과 마법사들(2006) 사이의 시간 탓일까.
그 시간을 지나며 감독은 '마법사들'의 하산하는 스님처럼 화두를 푼 걸까.
송일곤의 영화를 보면, 누구나 자신의 삶만큼, 딱 고만큼만 쓸 수 있다는 어디서 줏어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ps. 알포인트와 거미숲을 보면서, 감우성이 얼마나 한국 영화계에서 귀한 캐릭터인지 다시 한 번 절감했다. 이만큼 인텔리한 고독함을 잘 살릴 수 있는 캐릭터를, 그러면서 강한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는 배우가 한국에 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