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그것은 꿈이었을까
narre
2005. 1. 12. 15:29
내가 아이들 사진을 찍기 시작한 이유는 녀석들 때문이었다.
녀석들이 빌라 앞의 그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 햇님이 그려진 돗자리를 깔고 누가 무슨 역할을 할지 아웅다웅하며 병원놀이를 하는 모습이 너무나 예뻐보였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바람에 돗자리가 날아갈까봐 돗자리 끝자락에 그 조그만 신발들을 올려놓은 모습이 어찌나 따뜻하고 귀엽던지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녀석들의 따뜻한 표정과 추억을 담은 사진을 녀석들이 십년 이십년 뒤에 앨범을 뒤적이다 발견하곤 나처럼 피식 웃을 수 있길 바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참을 대인기피증으로 고생하던 나는, 어렵사리 녀석들에게 모델제의를 했고 녀석들은 순순히 내 제의를 받아들였다. 평소라면 여러컷 구도를 바꿔가며 셔터를 눌러댔을 텐데도 그날만은 단 한 컷 밖에 찍을수 없었다. 처음으로 생판 남에게 말을 붙여 찍은 사진이라 내가 소심했던 탓일까... 아니다. 난 그날의 그들이 만들어낸 아우라를 훼손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이 아우라와 아무런 상관이 없을지라도 정성을 기울여 단 한 컷만 찍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난 녀석들의 앙증맞은 신발과 병원놀이 가방과 햇님이 그려진 돗자리를 담았고, 그리고 새카만 그네들의 얼굴에 그려진 환한 표정을 담았다.
나의 아버지도 어느 정도는 사진에 취미가 있으셨던지 캐논의 수동카메라로 어린 시절의 나를 담아 주시곤 하셔서, 지금도 앨범을 들춰보면 장난기 가득한 내 모습이 한가득 있다. 하지만 앨범을 볼 때마다 딱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는데, 그건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은 거의 없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뭐 별 수 있나. 삶에 치여 직장생활에 바빴던 아버지에게 해가 중천에 떴을때 한창일 어린 아들의 놀이시간을 함께할 여유는 없었을테니까...
난 그런 마음으로 녀석들의 사진을 소중히 내 사진기에 담았고, 이후로도 종종 골목길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불러세워 사진을 찍어주곤 했다. 지네끼린 마구 티격대던 녀석들도 사진을 찍는다면 뭐가 그리 좋은지 어깨동무를 하며 연신 싱글거렸고 난 그 웃음에 한참 꿀꿀했던 기분을 가뿐히 날려버리고 즐겁게 셔터를 눌러댔다. 그리고 그렇게 찍은 사진들을 녀석들, 혹은 녀석들의 부모님에게 전해주며 다시 한 번 정말 순수하게 즐거울 수 있었다.
그런데.. 정말 그런데 말이다. 유독 처음의 녀석들만 동네에 보이질 않았다. 사진을 인화한 다음날 부턴 세장씩 인화한 녀석들의 사진을 외출 때마다 꼬박꼬박 가방에 넣어다니며 골목길을 살펴보는데, 그 많은 아이들 속에 녀석들만이 보이질 않았다. 이사를 갔나.. 셋 모두 이사갔을리는 없는데... 벼라별 생각을 다하며 오늘도 한참을 녀석들을 찾았지만 허탕이었다. 그러다 문득 가방에서 녀석들의 사진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고는, 혹시 그때의 그 일은 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흑백사진이 상기시키는, 그날의 따뜻한 햇살과 녀석들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내 어린시절에 대한 데쟈뷰를 불어일으켜 비현실적으로 몽롱한 기분이 되어 한참을 골목길 한 가운데에 서있었다. 주위의 아이들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자전거를 타고, 뜀박질을 하는데도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 먹먹한 무음의 공간에서 한참을 헷갈려하며 서 있었던 것 같다. 한 번 꿈이라 생각하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꿈속에서 나는 유년시절의 내 모습을 향해 피식 웃으며 찰칵하고 셔터를 눌렀던 것 같았다. 왜 그 비현실적인 상상에 그리도 깊이 빠져있었을까...
아직도 녀석들의 사진은 내 가방 속에 고이 담겨있다. 녀석들의 수만큼 세장씩 인화한 채....
언젠간 녀석들을 찾아 그 사진을 웃으며 건네주겠지. 장난기 가득한 왼쪽의 남자아이도, 줄곧 어른스런 표정을 지었던 가운데 남자아이도, 살짝 보조개가 패이던 왼쪽의 여자아이도.. 언젠간 만날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건네는 그 사진들과 함께 그날의 아우라는 그네들의 조그만 손으로, 품으로 넘어가겠지.
하지만 유년의 나를 향해 셔터를 누르던 그 기억, 동네아이들이 뛰노는 골목길에서 한참을 서 있던 그 기억이 내게도 남아있는 한, 아우라를 담보하는 것은 역시 사진이 아닌 그 무엇인가보다.
사진은 아우라를 매개하는 것이고. 뭐, 그게 아우라가 아니라도 상관없는거고..
아직은 나의 사진이 나를 향하고 있구나...
2003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