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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선 안될 여행은 없다
narre
2005. 1. 12. 15:34
여행을 떠나는 것은 의외로 간단한 일이었다. 처음엔 밀린 숙제들과 과외, 약속들에 질려 '지금 떠난다는는 것은 비현실적인 판단이야'라고 생각했지만, 곰곰히 다져보니 이건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몇 가지 일상적인 것들을 포기하느냐 마느냐의 선택의 문제일 따름이었고, 아직 내가 포기할 것들은 생존과는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사소한 것들이었기에 간단히 제쳐둘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 왜 그렇게나 망설였는지, 떠나고 나서는 당최 이해가 되질 않았다.
교통수단은 두 다리와 버스만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별 이유는 없었지만 한두가지 제약이 새로운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까. 그렇게 낙성대에서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하는 289-1을 탔다. 서서히 슬로모션으로 차가 출발하자 뒷자석의 여고생들은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고, 나는 그 시원함 바람을 함께 맞으며 묘한 동료 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저들은 시험이 끝났고, 나는 여행을 가는구나. 우린 무언가로부터 해방되었구나. 잠시나마.
서점에선 책을 살 수가 없었다. 책 없는 여행의 경험이 드물어, 필시 이건 여행에 대한 좋지않은 징조라고 생각했지만 이내 독서를 통한 사유보다는 마음을 감싼 혼잡한 찌꺼기들을 걷어내고 차분히 생각을 할 기회를 준 거라고 생각을 고쳐 먹었다.
밥을 제때 해결하지 못해 약간의 요기거리를 챙겨들고 고속버스에 올랐다. 창가의 단독 좌석이라 꽤 편안했다. 조금씩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어 촉촉하고 고요한 기운이 버스 안을 채우고 있었다.
출발을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그리 많지 않은 사람이 조용히 앉아 제 볼일을 보고 있었다. 스포츠신문을 든 의경, 창 밖을 보는 아저씨, 체크무늬 루카스 가방을 맨 여고생등 다양한 연령대의 다양한 직업을 지닌 사람들. 신기한 것은 열세명의 사람들 모두가 혼자였다. 평일의 이른 오후에 동쪽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 사람들은 대개가 그런가.
전날 잠을 설친 탓인지 서울시를 벗어나면서부터 꾸벅거리기 시작하다, 창문을 타고 흐르는 빗물이 어느새 작은 시내를 이룰 무렵 잠을 깨고 노트북을 펼쳐들었다. 주섬주섬 오늘의 일정과 감정들을 쓸어담는 타자소리.
벌써 네시, 나는 오늘 바다를 볼 수 있을까.
창문은 초조한 심정을 반영하는 양 닦으면 닦을수록 뿌옇게 흐려지는 속도가 빨라진다.
신발은 한쪽만 물이 스며들어서는 기분나쁘게 축축한 상태를 유지했다. 그리 깔끔한 여행은 되지 않으려나보다.
안개로 가득찬 바다를 보고싶다. 수평선 같은건 없다고, 세상에 그렇게 명확한 경계가 어디있느냐고 말하는 바다를 보고싶다. 비가 내려서, 어두컴컴한 땅속을 지나지 않고 온전히 비로만 존재하다 바다로 떨어지는 물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다.
예기치 못한 반전은 목적지로 가는 마지막 산을 넘어서야 시작되었다. 비가 그친것이다.
아니 그곳에는 애초부터 비가 내리지 않은 듯했다. 시커먼 아스팔트 도로는 물기 한 모금 머금고 있지 않았다.
터미널에 내려 폭우는 남의 나라 이야기라는 듯 가방을 돌리며 장난을 치는 아이들을 보며, 다시 돌아갈까 생각했다. 바다로 떨어지는 비를 보지 않으면, 비를 맞이하는 바다를 보지 않으면 이번 여행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으니까.
하지만 타고 말았다. 버스를. 바다로 향하는 버스를. 왜였을까.
목적지 한 정거장 앞에서 나는 내렸다. 그곳부터 바다 앞까지 넓고 고요한 호수가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호숫가에는 오래전에 항해를 그만둔 낡은 배들이 뒤집혀 썩어가고 있었고, 수달로 보이는 신기한 동물들이 굵은 꼬리로 호수바닥을 쳐대고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다리가 긴 쇄백로들이 물고기를 잡고 있었고, 하늘에는 바다에서 잠시 놀러온 갈매기 떼들도 보였다. 호숫가로 난 한적한 자전거길로 동네 사람들이 조깅을 하고 있었다. 선수촌이나 되는양 그 숫자가 상당했다. 나는 고요함속에 간간히 들리는 그네들의 탁탁, 첨벙하는 소리가 너무 좋아서 한참을 멍하니 귀기울였다. 그리곤 사진을 찍었다. 고요해보이는 호수 이면에서 꿈틀거리는 무엇들을 담아내고 싶었다.
바다에 도착하니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안개가 자욱했다. 먼 곳에서는 구름이 걷히고 있어서 사이사이 헤집고 나오는 빛줄기들과 함께 나름의 운치를 자아냈다. 몇 팀의 가족과 연인들이 모래사장을 따라 걷고 있었고, 한 명의 군인이 홀로 앉아 먼 곳을 보고 있었다.
다행히 수평선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명확한 경계가 있었다면, 아마 나는 다시 서울행 버스를 탔을지도 모른다.
혼자 천천히 걷고 있으려니 어디선가 흰 강아지 한마리가 졸래졸래 걸어왔다. 나를 따라왔다기보단 그냥 제 할 일을 하는 표정이었다. 녀석은 묘하게 내 주위를 맴돌면서도, 나를 향해선 눈길을 주지 않았다. 가끔 바다 저편의 먼곳을 한참 바라보다가 오줌을 찍 갈기곤했다. 그 무관심의 매력에 끌려 몇 장 녀석의 모습을 담았다.
방을 얻었다. 모래위에 지어진 민박으로 바다로 향한 창이 넓게 나있고 창가엔 작은 테이블과 소파가 있었다. 창문을 열면 철썩철썩하고 파도소리가 가까이서 들리는 것이 마음에 꼭 들었다. 몇차례 흥정 끝에 조금은 방비를 깎을 수 있었다.
밤이되자 폭죽소리가 간간히 들리더니 곧 잠잠해졌다. 어디선가 "야이 씹새끼들아"로 시작하는 중년의 외침이 들려왔다. 저 멀리 도시에서 퍼담아와 바다로 방류하는 오수와 같은 외침. 한바탕의 절규는 곧 파도소리에 묻혀 잠잠해졌다. 무한히 반복되지만, 몇시간이고 들어도 결코 질리지 않는 파도소리. 단 한 번도 정확히 같은 적은 없기 때문일꺼라고 생각했다. 그 소리들을 배경음악으로 맥주를 마시며 비디오를 봤다. 슬리퍼스와 이소룡이 나오는 정무문. 중간엔 한 아저씨가 창문을 두드리더니 물을 좀 달라고 하기도 했다.
다섯시쯤 되자 서서히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창문을 활짝 열고 바깥을 내다보니 인적없는 모래사장 위로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잠깐 사진을 찍고 첫차를 타기 위해 짐을 꾸렸다. 차를 타기전에 새벽녁의 호수는 어떤 모습인지 궁금했기 때문에 그곳으로 가보았다.
선계의 풍경이 이러할까. 금방이라도 물이 고일듯 축축한 공기속에 온갖 이름모를 새들이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자욱한 안개속에 커다란 쇄백로의 날개짓이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름모를 커다란 물고기들이 첨벙하는 소리를 내며 우아한 자태를 수면 위로 드러냈다. 그때였다. 상의만 군복을 걸친 남자가 나를 불렀다. 어제밤에 창문을 두드리곤 물을 달라던 남자였다. 그는 이틀을 굶었다고 밥한끼를 사달라고 했는데, 내가 첫차시간에 늦을지도 모르니 돈을 드린다고 하자 돈은 됐다며 비틀거리며 걸어가버렸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에 나는 마음이 불편해서 그를 불러 근처의 편의점으로 함께 갔다. 김밥과 김치와 우동을 사서 뜨거운 물을 붓고 나서야 그는 조금씩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입을 열자 며칠 굶은 사람 특유의 지독한 냄새가 풍겨져 나왔다.
그는 경남 거제가 고향인데 지금은 집나간 가족을 찾으러 강릉에 온 것이라 했다. 특히 마누라가 가져간 돈이 문제가 아니라 함께 나간 아이들을 꼭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맥락없이 해병으로 십오년을 복무하다 해외파견을 거쳐 울산에서 용접공으로 일한 경력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돈이 떨어진지 아흐레가 지났다고 했으니 살아있는 것이 용할 지경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직은 자존심도 남아있고,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경향이 있긴 했지만 아주 이상한 상태는 아니었다. 단지 오랜 굶주림과 가족에게 버림받았단 사실이 그를 조금 변하게 한 것 같았다. 내가 첫차시간을 놓칠 것 같아 이만 가보겠다고 말하자, 그는 사람들 시선이 신경쓰이니 호수의 벤치에서 먹겠노라고 해서 같이 이동을 했다. 멍하니 호수 저편을 보다 이내 정신없이 우동사리를 넘기는 그를 두고 나오려는데 그는 이제는 내게 약간의 돈을 요구했다. 마침 뽑아놓은 돈이 얼마없기도 했지만, 그가 가족을 찾는 것이 과연 가족들에게 좋은 일일지 나는 도무지 판단할 수가 없어 마지막 그의 요구에는 응하지 않았다. 다시 그는 우동을 삼키기 시작했고,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그곳을 떠났다.
버스를 타고 터미널로 가는길에 작은 인력알선 업소가 보였는데, 새벽부터 수많은 남자들이 나와 한자리씩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꼭 아까의 그 남자 또래였다. 그들이 일제히 꼬나문 담배 끝줄기에서 일제히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부슬비를 뒤로하고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애잔했다. 바닷가 마을의 평온함과 작은 여유는 결국 환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곳에도 역시 절절한 생활과 어두운 사연들이 오래된 구렁이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보이지 않은 것처럼 서울과 그곳의 경계도 보이지 않았다. 무관심한 개의 뒷모습과 군인이었던 남자의 시커먼 손, 그리고 일제히 피어오른 담배연기. 하지만 나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새벽의 바다에서 무언가를 확인한 것 같다. 파도처럼 반복되지만 질리지 않는, 그러면서도 명징하게 드러나진 않는 무엇.
역시나 떠나선 안될 여행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