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방정리를 하다
narre
2005. 9. 22. 22:24
서늘하다.
얼마만큼 서늘하냐면, 운동을 하고 샤워를 한 뒤에 다시 땀이 나지 않을 만큼 서늘하다.
헌책방에 들러, 쿤데라와 사강의 책 세 권을 샀다. 합쳐서 요즘 소설 한 권 값이 채 안 들었다. 가격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어쩐지 한 번 손을 거친 물건이 좋다. 새 것을 살 땐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강박 같은게 있는데, 헌 것은 그런 부담이 없다. 헌 책의 경우엔 90년대의 그 낡고 촌스러운 디자인도 꽤 마음에 든다. 이런저런고로 헌책방에서의 책 수집은 필요한 물건을 사는 행위라기 보다는, 취미생활에 가깝단 생각이 든다.
방정리를 핑계로 온 방을 어질러 놓았다.
바닥엔 간신히 내 몸 하나 누일 자리가 남아, 그곳에 몸을 누였다.
가득한 무질서 속의 편안함.
완벽하게 정리된 방의 침대에 누었을 때 느끼는 편안함과는 다른 느낌이다. 놓아버림에서 오는 해방감이랄까, 이래도좋고 저래도 좋다는 식의 나이브함이랄까.
방을 치우지 않고 의자만 끌어와 영화를 봤다.
<사랑에 관한 세가지 이야기(about love)>라는 제목의 PIFF 상영작.(내 ftp에 올려놓았음)
언어가 다른 남녀의 만남을 다루는 영화는 언제나 흥미롭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흔히 망각하는 언어의 한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그들은 이미 전제하고 만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들은 언어 외의 무언가로 소통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표정, 몸짓, 그림, 사진...
이들은 디테일해질 수 밖에 없다.
아... 소통.
21세기는 소통을 강요하는 온갖 기술매체들로 가득차 있어서, 오히려 인간 종족의 소통의지는 점점 감소하고 있다.
휴대폰과 이메일, 메신저로 인한 소통의 양적 범람은, 소통그릇의 질적 소통이 채워야할 부분까지 채우고 넘쳐, 이제 소통그릇은 비계만 가득찬 김치찌개마냥 느끼해지고 만 것이다.(과연 최근 오십년간의 통신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이해에 얼마만큼의 공헌을 했을까?) 이러한 소통의지의 감소는 치명적이어서, 유전자 정보로 세대를 거치며 누적되어 언젠가 인간 종족은 언어를 배우려는 의지가 완전히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새로 태어난 아기는 울음만 터트릴 뿐, '엄마' '아빠' 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대신... 그간 연구되지 않았던 신체의 다양한 부분들을 활용한 몸짓언어가 발달하게 되고, 인간들은 훨씬 다양한 표정을 가지게 된다. 살롸살롸...SF 소설 쓰는 중 -_-
방정리나 해야지.
얼마만큼 서늘하냐면, 운동을 하고 샤워를 한 뒤에 다시 땀이 나지 않을 만큼 서늘하다.
헌책방에 들러, 쿤데라와 사강의 책 세 권을 샀다. 합쳐서 요즘 소설 한 권 값이 채 안 들었다. 가격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어쩐지 한 번 손을 거친 물건이 좋다. 새 것을 살 땐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강박 같은게 있는데, 헌 것은 그런 부담이 없다. 헌 책의 경우엔 90년대의 그 낡고 촌스러운 디자인도 꽤 마음에 든다. 이런저런고로 헌책방에서의 책 수집은 필요한 물건을 사는 행위라기 보다는, 취미생활에 가깝단 생각이 든다.
방정리를 핑계로 온 방을 어질러 놓았다.
바닥엔 간신히 내 몸 하나 누일 자리가 남아, 그곳에 몸을 누였다.
가득한 무질서 속의 편안함.
완벽하게 정리된 방의 침대에 누었을 때 느끼는 편안함과는 다른 느낌이다. 놓아버림에서 오는 해방감이랄까, 이래도좋고 저래도 좋다는 식의 나이브함이랄까.
방을 치우지 않고 의자만 끌어와 영화를 봤다.
<사랑에 관한 세가지 이야기(about love)>라는 제목의 PIFF 상영작.(내 ftp에 올려놓았음)
언어가 다른 남녀의 만남을 다루는 영화는 언제나 흥미롭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흔히 망각하는 언어의 한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그들은 이미 전제하고 만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들은 언어 외의 무언가로 소통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표정, 몸짓, 그림, 사진...
이들은 디테일해질 수 밖에 없다.
아... 소통.
21세기는 소통을 강요하는 온갖 기술매체들로 가득차 있어서, 오히려 인간 종족의 소통의지는 점점 감소하고 있다.
휴대폰과 이메일, 메신저로 인한 소통의 양적 범람은, 소통그릇의 질적 소통이 채워야할 부분까지 채우고 넘쳐, 이제 소통그릇은 비계만 가득찬 김치찌개마냥 느끼해지고 만 것이다.(과연 최근 오십년간의 통신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이해에 얼마만큼의 공헌을 했을까?) 이러한 소통의지의 감소는 치명적이어서, 유전자 정보로 세대를 거치며 누적되어 언젠가 인간 종족은 언어를 배우려는 의지가 완전히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새로 태어난 아기는 울음만 터트릴 뿐, '엄마' '아빠' 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대신... 그간 연구되지 않았던 신체의 다양한 부분들을 활용한 몸짓언어가 발달하게 되고, 인간들은 훨씬 다양한 표정을 가지게 된다. 살롸살롸...SF 소설 쓰는 중 -_-
방정리나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