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강요한다

narre 2005. 1. 12. 14:59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다 보면 필히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는
과정에서 거대한 계단으로 이루어진 그 출구란 곳을 지나쳐 올라와야 하는데, 나는 이곳이 무척이나 두렵다. 특히나 봄날엔 말이다.

천천히 계단을 걸어 올라가다 이상한 기분에 문득 위를 올려다보면 모든걸 생성 시키고 나서야 만족할 듯한,그런 격렬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건 마치 수 천 마리의 털 짧은 고양이들이 머리 위로 '후두둑'하며 떨어져 내리는 것 처럼 나른하고 현기증나는 기분이다.
상상해보라. 고양이란 말이다. 개도 아니고, 더군다나 닭도 아니다.
그 가볍지만 무거운 햇살을 맞고 있노라면 내 자신이 한 없이 초라해진다.

게다가 녀석은 폭풍 같은 바람과 함께다. 쳇, 바람이라니. 지하철 출구엔 마치 세상 바람 성씨 쓰는 놈은 죄다 모아 놓은 것처럼 격풍이 인다. 녀석은 봄의 모든 감정과, 냄새, 그리고 그 순수한 부대낌까지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래서 터질 것 같다. 이건 마치 산소과잉과도 같다.
과잉에 의한 질식. 피가 어떤 산소랑 결합할지 몰라 폭주한다.

그리고는 서서히 홍채가 줄어들면서 정신이 아늑해져서 난간을
잡지 않고는 서 있기 힘든 상태가 된다.
떨구어진 시선엔 풀려가는 다리가 보인다.

게다가 나는 왕따다. 내 편이라곤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이 녀석 둘이
쓰윽 훑고 지나가면 다른 녀석들은 줏대도 없이 제가 겨울동안
꼭꼭 감쳐왔던 것들을 헤벌레 펼쳐 놓는 것이다. 젠장, 내가 숨겨 놓은 것이 어디있단 말이냐. 나도 알고 싶다.

반항도 잠시다. 나는 이내 백기를 들고 만다.
나는 그 앞에 내세울 논리가 없다. 빈약한 나.

좋다. 새로 쥐어 짜서라도 네게 펼쳐 보이리라.

20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