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부전자전

narre 2006. 7. 18. 13:57

부산에 내려와있다. 밖에 떨어져있다보면, 가족관계에서 중재자 비슷한 역할을 할 때가 꽤 있는 것 같다. 엄마 아부지 관계에서도 그렇고, 동생과 부모 관계에서도 그렇고. 생활을 부대끼며 자잘한 부분에 얽혀있지 않다보니, 이것저것 이야기하기가 편한 위치에 있나보다.

학생 때는 엄마 아버지가 싸우는 걸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다. 그만큼 자식 앞에 조심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러기 위해 여러가지 것들을 쌓아두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아버지는 논리적으로 이야기 하길 좋아하지만 가끔 억지를 부렸고(나와 비슷하다), 엄마는 그게 싫어서 적당한 때에 미리 이야기를 그만두는 사람이었다. 젊을 때는 자녀교육등의, 부모가 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다른 일들이 우선순위 였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없다가, 나이가 들자 둘의 관계에서 30년가까이 내재해 있던 문제들이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고, 이제는 예전의 묵묵히 받아 넘겼던 그 어무이가 아닌지라, 부산의 바다 근처 어느 아파트 거실에서는 날로 부부싸움 비스무리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싸움을 조금 들여다보면, 대한민국의 50대 부부들 태반이 가질만한 케케묵은 전형성에 슬쩍 웃음이 나올 것도 같지만, 이거이 남 일이 아니다보니 나름의 걱정이란 걸 아니할 수 없고,  적당히 양측의 장단을 맞추며 상대의 이해할 수 밖에 없는 모습(그러나 이미 서로 다 알고 있는 모습)을 언급하는 것 밖에 할 일이 없는 나로서는 안타깝기도 한 것이다.

비슷하게 적당히 반복되는 일들이지만, 이번에 새롭게 발견한 것이 있는데 그건 그렇게 다르다고 생각했던 아부지를 점점 닮아가는 내 모습이다. 옛사람들이 그렇게 '아부지는 싫어하면서도 결국엔 닮는 법'이라고 할 때도 나는 아니라고 했는데, 아닌게 아니었던 가보다. 에효, 핏줄이란게 정녕 있는 것인지, 어무이와 함께 가만히 족보를 따져보니 작은 아부지며 막내 삼촌이며 두루두루 비슷한 문제점을 안고 살고 있는 것 아닌가.  신기하기도 하면서, 새삼 걱정 시렵다.

이토록 나를 걱정하게 만든 가문의 문제가 뭔고 하니, 다름아닌 애처증이다. -_-
이는 속세에서 흔히 회자되는 그 적당히 야릇하고 부드러우면서 호의적인 뉘앙스는 아닌데, 왜냐하면 이 치들은 삶의 다른 영역들에 그만큼 애착을 가지지 않고 한 곳에 역량을 집중하면서  상대에게도 같은 식의 집중과 노력을 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고로 좋을 때야 좋지만, 상대의 자야실현과 사회활동 등 많은 부분에 본의아닌 제약을 하게 되고, 그런바 서서히 문제가 쌓여가게 된다. 게다가 이때 자신에게만 집중하지 않는 상대의 생각과 행동을 지적하고 설득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술, 감정적인 '싫음'을 이성적인 '그름'으로 치환하는 어법은 얼마나 구차한가.

아무튼 차씨 집안의 숨겨진 비밀, 애처증은, 적당한 바람기에 사교적인 성격이라고 생각해왔던 나로서는 충격적인 증상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 '야릇하고 부드러우면서 다소 호의적인' 측면은 피를 보글보글 끓여서라도 이어가고 싶지만, 이는 '애처'에서 끝나야 하고 '증'까지 가면 곤란하다. 허나 다행인건 나에겐 차씨 집안의 피 뿐 아니라, 손씨 집안의 피도 흐른 다는 사실이다(아부지 죄송합니더). (그간의 사랑을 생각해 조금 띄우면) 보헤미안의 기질을 타고 났으나, 열악한 시대와 조건 속에서 적당히 타협하고 살 수 밖에 없었던, 어무이의 핏줄이 나를 내버려두진 않으리라. 고거이 나의 작은 희망이다.

이렇게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핏줄 신봉자가 다 되어가고 있다. 지난날 아부지와 그토록 싸우면서 확인하고 또 확인했던 '차이'들은, 날이 갈수록 신기하게 닮아가는 모습들을 통해 희석되어가고 있다. 그러면서 점점 부모도, 동생도, 이해하고 공감하고 또 그만큼 사랑하게 되는 것 같긴 한데, 한편으론 또 '한 발짝 떨어져 있으니 그런게지' 싶기도 하다.

어째 부산 올 때마다 노가리만 실컷 까고 간다. 아니구나, 실컷 듣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