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 커튼

narre 2005. 1. 12. 16:02


처음 이 집에 이사왔을 때였다.
샤워만 하면 축축해지는 나무문이 걱정되었는지 주인 아주머니가 어디서 샤워커튼을 하나 사왔었다. 시퍼런 비닐 위에 무슨 아기 욕실도 아니고 물고기가 덩글덩글 그려져 있는 것이 어찌나 촌스러운지, 나는 새로 하나 살까 고민까지 했었다. 그러나 내가 언제 공짜를 마다한 적 있었나. 신품 구입의 허황된 꿈은 봄날 총각 맘 설레듯 하루 저녁 고민으로 끝났고, 그래도 제딴에 성능은 좋아서 그 후로 나무문은 억울한 물벼락을 피할 수 있었다.

내 생각에 원룸생활 최고의 즐거움은 음악을 들으며 샤워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뭐 세상 어딘가엔 음향시설 빠방한 샤워실도 있겠지만, (다행이도) 내 근처에 그런 녀석은 없고, 그 덕분에 물줄기 사이로 음악이 흘러나온단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감지덕지 할 수 있다.
볼 사람 없겠다, 들을 사람 없겠다, 아침이면 나는 스피커 볼륨을 한참 올리고는 샤워커튼 속으로 몸을 숨긴다. 샤워실의 불은 켜지 않는다. 대신 창문을 연다. 그러면 작고 희미한 빛줄기가 이 어두침침한 공간에 꼼지락 거리며 발을 내민다. 샤워기를 틀면 잔뜩 참았다 갑자기 터져나온 꼬마아이 오줌 같은 물줄기가 빛줄기를 만나 반짝인다. 그리곤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때 알았다. 이 촌스런 샤워커튼이 참 예쁘단 걸.
유치한 형광색 물고기들이 저기 남태평양의 물고기 같았다.
창문으로 쏟아지는 빛이 정말 바다 아래서 본 햇빛 같았다.

나는 문을 닫고 끝도 없이 샤워기를 틀고 싶었다.
내 키보다 높이, 창문에 출렁일 만큼 물을 채우고 싶었다.

그럼 바다 같을텐데.

난파된 배처럼 물이 가득찬 샤워실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유치한 물고기들이 그려진 촌스런 샤워커튼을 멍하니 보고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음악도 흘러나오고. 빛도 쏟아지고. 시간은 정지하고.

언제나 몽상의 마침표는 같은 곳에 찍혀진다.
수압을 견디지 못한 나무문이 우지직하며 부서지고
내 작은 방이 물바다가 되는 상상.

내 상상에 엎질러진 그 물들의 축축함.
부서진 나무문의 뾰족하고 날카로운 결들.
아무것도 모른척 순진하게 쏟아지는 햇살.

나는 뽀도독 소리가 날 때까지 샤워기의 꼭지를 잠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