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아버지와 나

narre 2006. 3. 2. 14:19
부산집은 이사 문제로 요즘 정신이 없다.
결혼 이후 티나는 부부싸움 한 번 없이 지내오던 부모님이, 신혼부부처럼 다투고 삐지고 아주 난리들이시다. 아마 어무이가 이제는 자신도 의사표명을 분명히 하겠다고 선언하신 때문일게다.
대충 우리집의 문제는 아부지가 억지를 부리면서 거기에 이것저것 말을 가져다 붙이는데서 비롯되니까. -_- 한참동안 엄마랑 통화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이런저런 불만들을 다 듣고, 적당한 타이밍에 끄덕끄덕 맞장구를 친다. 그리고 이것이 집안에서의 내 역할. 장남이기보단 큰 딸 같은.
낚시나 가서 며칠 좀 안봤으면 좋겠는데, 동생 졸업식이라고 휴가내더니 삼일 내리봐서 힘들다는 말씀.에
'아버지 원래 그런거, 이제 좀 익숙해지실 때도 됐지 않수. 그냥 그러려니 해요.'
라며 통화를 마무리한다. 평생 살아도 익숙해지지 않을꺼다라고 하시면서도, 답답함을 쏟아놓고 나니 조금은 시원한 마음인 엄마.

그러다 며칠 뒤에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아버지였다.
받는 순간 울음이 왈칵 쏟아질 정도로, 힘이 없는 목소리였다.
탁구대회를 나간 엄마는 피곤해서 일찍 주무시고, TV의 축구도 끝이 나고, 동생도 아직 들어오지 않아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이런저런 안부가 오가고... 그래, 밥 잘 챙겨먹고 일찍 들어가라며 전화를 끊으시는 아버지.

평소와 유사한 대화였는데도, 가슴이 먹먹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당신의 힘없는 목소리. 이제는 나도 늙고 지쳤다는 그 목소리...를 편안하게 들을수가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인 신림역에서, 나는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엄마가 항상 답답해하는 아버지의 억지들.
그게 어디에서 비롯된건지 난 안다.
그리고 그 원인이 지금까지 당신의 생애를 어떻게 옥죄어 왔고, 나에게 영향을 미쳤고, 지금의 가족관계를 만들었는지도 절절히 안다.
그래서, 언제나 엄마편에 서지만(엄마가 옳으니까), 아버지를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의 외로움과 약함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통화를 마치고 문자를 보냈다.
힘내시라고, 다음에 내려가면 맥주 한 잔 해요라고, 그리고 아버지 사랑한다고.

답이 온다.

고맙다. 나도 사랑한다.

...

한 때 물리적으로도, 마음으로도 집을 완전히 떠났던 적이 있었다.
가출 한 번 하지 못한 내 유년시절에 대한 보상처럼,
대학 입학과 함께 시작된 내 서울생활은 예쁘게 포장한 가출이자 독립이었다.
세상에 홀로 존재한다는 그 고독한 적막과 외로움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그때의 난, 나 외의 어느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 난 가족에게 사랑을 느낀다.
사랑한다고,감사한다고, 조금은 부끄럽지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부모로서의 집착과 욕심이 사라지고, 자식으로서의 증오와 억압이 사라지고,
세상에 태어나 죽어가는 고독한 인간과 인간으로 서로를 사랑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사랑을 쑥쓰러워하기엔 시간은 너무도 빨리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