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불안했다.

narre 2005. 12. 15. 02:33
예전에는 언제나 불안했다.

행복하면 행복한데로 그것이 언제 사라질지 몰라 불안했고,
그 행복의 밑바닥 깊숙한 곳에 무언가 무척 두려운 것이 숨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불안했다.
불행하면 불행한데로 그 안의 상처가 내 자신을 파멸시키진 않을까 불안했다.
그 상처의 틈만큼 나와 내가 벌어지고, 더이상 돌이킬 수 없지 않을까 불안했다.
세상도, 사람들도, 내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 하나 없어 불안했다.
당시의 나는 오직 불안함 뿐이었다. 죽음도 삶도, 무엇 하나 불안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어느날 나는
'도무지 믿을 수 있는게 없군' 이라고 중얼거리며, 마음의 깊은 문을 잠궜다.
두꺼운 옷을 입고 춥고 어둡고 깊은 지하의 그 방까지 내려가 오돌오돌 떨고있는 녀석-무언가를 발로 차서 넣고 무거운 자물쇠를 몇 개나 달았다.
그러고도 불안해 누구도 열지 못할 봉인의 주문까지 걸었다.

그랬더니 오히려 전보다 편히, 자주 웃을 수 있었다.
불안은 사라졌고, 안정된 나를 사람들은 더 편히 여겼다.
세상이 갑자기 쉽게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차츰 그 쉬운 세상에 적응해갔다.
편하군, 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상처받지 않고, 책임 지거나 지우지 않고, 나는 가벼이 흘렀다.
그리고 시간도 흘렀다.

또다른 어느날이었다.

문득.
견딜 수가 없어졌다.

내 불안은 상황이나 대상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불안한 것은 언제나 나 자신이었다.
나를 믿을 수 없었고, 나를 예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를 믿을 수 없었다.
그 평범한 진리를 나는 꽤나 시간이 지난 후에 깨달았다.

그 동안 잠궈진 문 안의 녀석은,
무의식이란 창고를 열고 닥치는대로 먹이를 삼켜 거대하고 음침하며 축축한, 괴물이 되어 있었다.
밤마다 녀석이 으르렁거리거나, 문을 두들겨대는 통에 편히 잠을 잘 수 없었다.
그 소리는 처음엔 희미했지만, 나중엔 집이 떠나갈 정도로 커졌다.
베개에 머리를 쳐박고 이불을 뒤집어 써도 잔인할 정도로 생생하게 들려왔다.
그래서

문득.
견딜 수가 없어졌다.
도저히.

며칠을 불면증으로 고생하던 나는,
결국 천둥처럼 괴물이 울부짓던 날 밤에 잠옷차림으로 슬금슬금 그 문 앞까지 걸어 내려가서,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또 한 번 꿀꺽 삼키고,
용기를 내어 문을 열었다.
끼익하고 문이 열리고 그 틈 사이로 녀석이 뛰쳐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노랗게 반짝이는 길게 찢어진 눈이 광기로 희번득거렸다.
곧이어 문을 박차고 나온 녀석은 미친소처럼 집 안을 휘젖고 다녔다.
부서지고 깨지고 쓰러지고, 집은 엉망이 되었다.
나는 두려웠다. 이대로가면 나의 세상은 파멸하는 것 아닐까.

하지만 놀랍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녀석은 점점 온순해졌고, 크기도 줄어들었다.
괴물 같이 온집안을 휘젖던 녀석이, 이제는 귀여운 강아지마냥 재롱을 부리기 시작했다.
발바닥을 핥고 손가락을 가볍게 깨물고 놀아달라고 심통을 부렸다.
나는 약간 어리둥절했지만, 결국 스스럼없이 녀석의 재롱을 받아주었다.
생각보다 따뜻했다. 녀석의 몸은.
어느새 깨어진 창문 사이로 스물스물 햇살이 넘어 들어왔고, 그 뒤를 따라 훈훈한 바람이 불어왔다.

햇살과 바람에 취해 나는 잠이 들었다.
녀석을 껴안은 채였다.
수 년간 그러지 못했던 '단순한' 잠이 찾아와, 나는 죽을만치 황홀했다. (생각보다 '단순함'과 '황홀'은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나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은
나를 인정하고 용서하고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그간 흘러간 세월의 편안함으로, 이제는 나를 조금은 알 수 있다는 것.
세상, 그리고 당신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것.
과거와 미래가 아니라 지금을 볼 수 있다는 것.
기쁨과 슬픔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부끄럽지 않다.
나의 웃음도, 눈물도, 그 무엇도.
이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