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욕망
narre
2005. 1. 12. 16:03
나는 화장실 문을 열고 대야에 물을 받는다. 그리곤 투실하며 울긋불긋한 내 욕망의 덩어리를 꺼내 따뜻하고 고요한 물에 담근다.한참 동안은 아무런 변화가 없다. 나는 참을성을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변화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일어난다.
무거운 것들, 나의 것이 아닌 것들, 불편한 것들이 서서히 바닥에 가라앉는다. 가벼운 것들, 나의 것들, 편안한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 스스로 움직인다. 나는 굳이 때타올을 들고 그것을 바득바득 밀어대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 물이 식지 않게, 출렁이지 않게 조금 주의를 기울일 뿐이다. 기다림은 짧지 않지만 지루하지도 않다. 제자리를 찾아 움직이는 욕망들의 폴랑폴랑 스륵스륵하는 소리가 내 귀를 통해 온 몸으로 퍼지고, 내 몸은 그 리듬에 맞춰 편안해진다.
이제 대야엔 바닥을 가득 메운 시커먼 침전물들과 해파리처럼 가벼이 유영하는 욕망의 원형질들이 있다. (사람들이 욕망에 대해 '더럽다'는 둥의 부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이 침전물들에 대해 가지는 인상을 욕망 자체와 혼동하기 때문이다.) 욕망은 제자리를 찾았지만, 결코 머무르지 않는다. 끊임없이 불규칙하게 움직인다. 그 동선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마치 고요한 대야 안에 조류가 흐르는 듯하다. 해파리들은 이제 웅웅하는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나는 소리을 내는 해파리들을, 내 욕망들을 조심스레 내 몸으로 담는다. 굳이 타올이나 드라이어로 말릴 필요는 없다.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욕망의 생명력을 싱싱하게 드러낸다.
이 작업이 내게 중요한 이유는, 이 원형질의 욕망들이, 그리고 그들의 소리가 닮은 이를 끌어당기는 인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경건한 의식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으면, 원형질의 욕망은 그를 둘러싼 수많은 불순물들로 인해 고정되어 썩어가거나, 왜곡된 소리를 냄으로써 엉뚱한 것들에 이끌리게 된다. 나는 이 변형된 욕망들의 엉뚱한 이끌림으로 고통받게 되며, 이 고통은 불만족과 자기기만이라는 수다스럽고 지루한 고문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나는, 대부분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거짓을 자백한다.
반면에 가볍고 편안하여 해파리처럼 유영하고, 제각각의 소리를 내는 원형질의 욕망들은 곳곳에 흩어져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나를 인도한다. 그리하여 나는, 이들 충실한 욕망들의 만남과 합일을 경험한다. 그것은 매우 충만하고 또한 포근하며 새로운 생성을 잉태한다. 그제야 나는 대야에 물을 담고 욕망을 담던 나에서 벗어나 욕망 그 자체가 된다.
일찍이 라깡은 욕망이 언어가 되면서 욕망 그 자체와 만나지 못하고 끊임없이 대상을 달리하며 환유되어 간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끊임없이 미끌어지는 언어의 그물망은 보았을 망정, 다른 감각기관으로 욕망을 대하지 못했다. 눈은 곧 이성이기에, 본다는 것은 곧 해석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보는 행위로는 욕망을 둘러싼 불순물들을 볼 뿐 욕망 그 자체와 직면할 수 없다.
욕망과 마주하기 위해서는
귀를 열고 코를 벌름거리고 발가벗은 몸으로 그것과 대면해야 한다.
웅웅대는 소리와, 짭쪼롬한 바다내음과, 질퍽하며 축축한 촉감을 온 몸으로 느껴야 한다.
무거운 것들, 나의 것이 아닌 것들, 불편한 것들이 서서히 바닥에 가라앉는다. 가벼운 것들, 나의 것들, 편안한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 스스로 움직인다. 나는 굳이 때타올을 들고 그것을 바득바득 밀어대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 물이 식지 않게, 출렁이지 않게 조금 주의를 기울일 뿐이다. 기다림은 짧지 않지만 지루하지도 않다. 제자리를 찾아 움직이는 욕망들의 폴랑폴랑 스륵스륵하는 소리가 내 귀를 통해 온 몸으로 퍼지고, 내 몸은 그 리듬에 맞춰 편안해진다.
이제 대야엔 바닥을 가득 메운 시커먼 침전물들과 해파리처럼 가벼이 유영하는 욕망의 원형질들이 있다. (사람들이 욕망에 대해 '더럽다'는 둥의 부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이 침전물들에 대해 가지는 인상을 욕망 자체와 혼동하기 때문이다.) 욕망은 제자리를 찾았지만, 결코 머무르지 않는다. 끊임없이 불규칙하게 움직인다. 그 동선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마치 고요한 대야 안에 조류가 흐르는 듯하다. 해파리들은 이제 웅웅하는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나는 소리을 내는 해파리들을, 내 욕망들을 조심스레 내 몸으로 담는다. 굳이 타올이나 드라이어로 말릴 필요는 없다.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욕망의 생명력을 싱싱하게 드러낸다.
이 작업이 내게 중요한 이유는, 이 원형질의 욕망들이, 그리고 그들의 소리가 닮은 이를 끌어당기는 인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경건한 의식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으면, 원형질의 욕망은 그를 둘러싼 수많은 불순물들로 인해 고정되어 썩어가거나, 왜곡된 소리를 냄으로써 엉뚱한 것들에 이끌리게 된다. 나는 이 변형된 욕망들의 엉뚱한 이끌림으로 고통받게 되며, 이 고통은 불만족과 자기기만이라는 수다스럽고 지루한 고문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나는, 대부분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거짓을 자백한다.
반면에 가볍고 편안하여 해파리처럼 유영하고, 제각각의 소리를 내는 원형질의 욕망들은 곳곳에 흩어져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나를 인도한다. 그리하여 나는, 이들 충실한 욕망들의 만남과 합일을 경험한다. 그것은 매우 충만하고 또한 포근하며 새로운 생성을 잉태한다. 그제야 나는 대야에 물을 담고 욕망을 담던 나에서 벗어나 욕망 그 자체가 된다.
일찍이 라깡은 욕망이 언어가 되면서 욕망 그 자체와 만나지 못하고 끊임없이 대상을 달리하며 환유되어 간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끊임없이 미끌어지는 언어의 그물망은 보았을 망정, 다른 감각기관으로 욕망을 대하지 못했다. 눈은 곧 이성이기에, 본다는 것은 곧 해석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보는 행위로는 욕망을 둘러싼 불순물들을 볼 뿐 욕망 그 자체와 직면할 수 없다.
욕망과 마주하기 위해서는
귀를 열고 코를 벌름거리고 발가벗은 몸으로 그것과 대면해야 한다.
웅웅대는 소리와, 짭쪼롬한 바다내음과, 질퍽하며 축축한 촉감을 온 몸으로 느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