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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권과 오만, 그리고 배려 - 여산
narre
2006. 6. 28. 00:35
인간은 스스로 이 세상과 자기 자신을 만들어 가는 존재이다.
세상은 관계(關係)이자, 모든 존재는 그 관계 속에서 자신만의 몫을 지니고 있다.
관계를 능동적으로 만들어 가며 동시에 그러한 관계 속에서 규정되어지는 나이기에 관계라는 세상의 존재 원리 속에 배려(配慮)와 월권(越權)과 오만(傲慢)이 나타난다.
같은 인간이라도 얼굴이 모두 다르듯이 세상은 다양한 것이 서로 어우러져 있음으로 해서 아름답다. 다양하다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며 차이(差異)를 말한다.
관계 속에서의 자신의 몫이 있다는 것은 우리 각자는 자신만의 고유한 주체성을 지니고 있음을 말하며, 이는 차이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요구한다. 자신만의 의견과 시각이 없는 자는 공허하다. 우리 모두는 그냥 이 차이 있는 모습 그대로 온전한 것이다.
또한 어우러져 같이 존재한다는 것은 서로 차별(差別)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자연은 결코 판단하여 차별하지 않는다. 따라서 차별은 인간의 몫이기도 하다.
한편, 차별이란 차이에 대한 판단(judgement)을 통하여 간택(揀擇)함을 말하는 것이니, 차별하는 자는 스스로 지닌 기준에 의해 속박되어 자유롭지 못하다. 판단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이나 관점을 기준으로 그 기준 속에 상대를 집어넣어 옳다 그르다 규정지어 버리는 것이며 이것은 상대에 대한 월권이 된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삶 속에서 자신만의 삶의 몫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가 대신할 수도 없이 가장 솔직할 수밖에 없고 절절한 각자의 삶의 몫 때문에 인생은 그리도 엄숙하며 책임이 따르는 것이다) 나의 기준으로 타인을 판단하여 정죄하는 월권은 나의 모습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폭력이며 진정한 상생 관계의 단절(斷絶)을 의미한다.
한편, 오만이란 월권에 의거하며, 월권을 상대에게 표현하는 자의 모습이다. 이것은 자신의 판단에 의거하여 상대를 변화시켜 보겠다는 적극적 간섭의 마음으로서, 이렇듯 미숙한 자는 관계 속에서 자신도 변해야 한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셈이다.
주위에서 손쉽게 몰 수 있는 연인 관계 등, 여러 유형의 인간 관계에서 상대의 삶에 개입하고픈 마음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삶의 엄숙함을 알아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는 성숙한 인간이라면 자신의 시각과 관점으로 상대를 판단하여 자신이 보기에 좋은 상태로 변화시켜보겠다는 것이야말로, 타인의 삶의 몫을 자신이 짊어질 수 있다는 오만이다.
설령 그 오만의 기준이 성경이나 불경에 나오는 사랑이나 자비라 할지라도 성숙한 이라면 오직 문을 두드릴지언정 문은 여는 것은 상대의 몫이요, 물가에 데려갈지언정 물을 마시는 것은 상대의 몫임을 명확히 알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문을 열거나 물을 마시는 것은 누구도 대신할 수없는 자신의 몫이요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점을 잊지않아야 한다).
불행히도 월권과 오만에 바탕을 둔 관계라는 것은 그 기간이 10년, 20년 되었다 해도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못하고 머무르고 있는 미숙한 관계의 지루한 연장에 불과하기에 몇 십 년 살다가도 헤어지는 부부처럼 시간의 장단은 전혀 의미가 없다.
그렇기에 자신이 성숙하여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을 수용할 수 있을 때 (관념이나 이해로 그렇게 하려한다면 결국 스스로 고통스럽게 될 뿐) 비로소 누구를 사랑하는 것이지, 그렇지 못한 상태의 사랑이란 결국 스스로의 변화를 거부하고 있는 자기애(自己愛)에 불과하다.
이러한 점에서 성숙한 관계란 것은 서로 상대방을 변화시키려 노력하지 않고 (노력하는 순간 월권과 오만이 작용하여 고통을 낳는다) 상대의 모습 그대로를 수용하며 이러한 관계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양쪽 모두 자연스럽게 ‘스스로’ 변화해 가는 것이다. 상대방의 모양새에 따라 각자가 ‘자신’의 모양새를 변화시켜 가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관계 속에서 ‘항상 자신을 되돌아 볼 때’ 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구도 대신 할 수없는 각자의 삶의 몫을 지니고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타인에 대한 애정이란 각자의 삶 속에서 어떻게 발현되어 가는 것일까.
비록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논리철학 논고’에서 ‘행복한 사람의 세계와 불행한 사람의 세계는 다르다’고 언급했지만, 그것은 관계를 고정되어 머무르는 것으로 보는 자들의 변명이다. 분명 두 세계는 다르지만 그것은 동전의 양면일 뿐 세상은 배려(配慮)를 통해서 상생의 관계로 끊임없이 변화해 간다.
관계속에서 배려란 것은 결국 스스로를 돌아보아 우열이 없는 서로의 다름에 대하여 명확히 인식하고 이를 통하여 너와 나의 관계 속에서 각자의 몫을 충실히 나타낼 수 있도록 서로 나누는 것을 말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월남전이 한창이던 1963년 광장에서 스스로에게 기름을 붓고 몸을 태워 목숨을 버린 베트남의 승려들의 모습 (이는 적극적 순교라고 나는 생각한다) 역시 묵묵히 자신의 삶의 몫을 지니고 치열하게 살아가며 너와 나의 관계 속에서 배려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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