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정장과 가을

narre 2006. 8. 19. 10:28


어제는 옷을 샀다. 정장과 와이셔츠와 넥타이 같은 것들.
잘 고르지 못하는 종류의 물건들을 꼼꼼히 살펴보려니 여간 힘이 든게 아니다. 구두를 신고간 덕분에 며칠전부터 아픈 왼쪽 발목이 금새 시큰거린다. 그나마 여름의 태양과 가을의 바람이 공존하는 미묘한 날씨가 후들거리는 다리를 지탱할 생기를 불어넣었다. 뜨겁지만 시원한 날씨.

가을이 온다고 생각하니 낯설다. 4계절이란 개념이 없는 지역의 사람들에게 변화란건 어떤 느낌일까. 우리와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싶다. 찬바람이 불면 내가 떠난줄 아세요, 같은 노래도 못 부를테고. 그러고보니 찬바람이 불기도 전에 학교를 떠나는구나. 가을이다 찬바람이다 벌써부터 촐싹거리다보니, 종로와 광화문이 떠오른다. 왠지 가을엔 바바리 코트를 입고 그쪽 동네를 거닐다가, 뜨거운 커피를 시켜서 훌훌 불어가며 마셔야 할 것 같은 키치가 내겐 있다.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니 키치라고 나무라기도 미안하다.

다시 돌아가면 나는 은근하게 정장을 좋아한다.
잘 고르지도 못하고 잘 관리하지도 못하고 잘 입지도 않지만, 어쩐지 정돈이 되고 마음이 가라앉는 느낌이 든다. 티셔츠보단 와이셔츠나 남방이 좋은 이유와 같다.

조금 정신이 없지만 다시 계절로 돌아가면 지금 같은 환절기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여름과 가을이 섞인 날씨처럼, 지금의 내 생활도 학교와 회사가 섞여있고 당분간은 적당히 그럴 것 같다. 이젠 좀 쉬고 싶은 과외도 한 녀석이 고3이라 수능까진 계속해야 할 것 같고, 회사에서도 당분간은 적당히 번역같은 것을 하면서 어깨너머로만 남들하는 일을 바라볼 것 같고. 아마 본격적인 가을이 시작되면 본격적인 일도 조금 배우지 않을까 싶다.

이제는 아이처럼 설레고 두근거리는 일이 많지 않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조금 지나면 적응이 되고 그럭저럭 살아갈거란 생각을 하게 되었지만, 적당한 변화가 있고 사는 환경도 만나는 사람도 나누는 이야기도 조금씩 바뀌어가면서, 그래도 여전히 만나는 사람이 있고 여전히 속해있는 곳이 있고 여전히 나누는 이야기가 있는, 그래서 한결 같으면서 지루하진 않은 그런 삶이라면, 한적할땐 푸근하게 심심하면서, 바쁠땐 정신있게 바쁜 그런 삶이라면, 아침에 양말은 짝짝이로 신더라도 점심에 구내 자판기커피보단 동구 밖 원두 한잔 마실 수 있는 삶이라면, 아싸리 괜찮지 않을까 생각을 한다.

과외 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