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종군사진기자
narre
2005. 1. 30. 18:14
종군 사진기자에 관한 1시간 반짜리 다큐멘터리를 봤다.
전쟁은 항상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허가되고 영웅시되는 집단 살인. 거대하고 절대적인 폭력 앞에 마주선 개인의 철저한 무력함. (문득 궁금하다. 전쟁 상황에서의 살인은 어떠한 법적 조항에 근거해서 허가되는건지.)
전쟁의 본질과 참혹성을 드러내는 냉철한 사진가의 눈. 언제나 홀로하는 고독한 작업. 이들의 고통을 팔아 성공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는 대목에선 손탁의 '타인의 고통'이 다시금 생각나면서, 전쟁사진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마지막에 작가의 20여년간의 작업들이 뉴욕의 번듯한 갤러리에 전시되면서, 각 구체적인 인간들의 구체적인 고통들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변질'되어 인류 보편의 본질적 고통이 되는 장면을 보며 손탁의 고민에 절실하게 공감할 수 있었다. 그 갤러리에 온 사람들은 정교하고 예술적인 구도로 포장된 사진들에서 가슴 속 깊이 끓어오르는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그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사진 속의 고통받는 이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건 논외로 하더라도, 그 감동은 앞으로 일어날 전쟁을 막을 수 있는 무언가로 연결될 수 있을까. 혹은 사진을 감상한 각 개인의 삶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을까. 갤러리를 방문할 정도의 문화적 상류층에게 단지 '감동적인 예술'로 소비되는데 그치는 것은 아닐까. 눈물을 흘리며 속에 쌓인 무언가가 정화되는 느낌을 받고, 자신이 이들보다 나은 처지에 있음에 감사하고 그냥 끝.
사진가의 몫은 어디까지인가. 그냥 찍고 드러내고 보여주면 되는건가. 나머지는 단지 감상자의 몫인가.
그 사진가는 진실해보였고,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 같았다. 적어도 화면 상으로 볼 때 내가 좋아하는 류의 사진가였다. 그리고 내가 그 사진가였더라도 자신의 20여년간의 사진을 갤러리에 전시하고 싶어했을 것이다. 사진가인 이상 세상에 인정받고, 많은 이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고 싶은 욕망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전쟁사진도 분명히 본래 가진 최소한의 역할은 수행한다.
사진을 본 사람 각각의 구체적 행동으로 이어지진 않더라도, 여론이란 것을 조성할 수 있기 때문에. 편집에 의해 검열되고 이용되지만, 신문에 실린 한 장의 보도 사진은 커다란 힘을 지닌다.
어렵다. 하지만 역시 '왜 사진을 찍는가'란 질문에 대한 자신의 대답과, 자신이 대상을 대하는 방식, 그리고 완성된 사진이 전시되고 유통되는 방식 모두에 어떠한 일관성이 있어야 함은 분명하다.
문득 다큐멘터리 사진가 최민식의 말이 생각난다.
자신이 가장 슬펐던 때는, 사랑하는 딸이 '아빠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팔아 유명해진 사람이에요'라고 말했을 때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여든이 다된 지금에도 여전히, 낡은 니콘 F4를 어깨에 매고 부산 용두산 공원 근처를 어슬렁거린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