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절

narre 2005. 3. 17. 00:52
11시간을 자고 일어나 잠에 대해 생각하다.

한 때 잠의 달인이셨던 심사마 님은 이것을 혼절이라 하여 범인의 잠과 구분하셨고, 11시간쯤 잤다하면 '이제 혼절 꼬리나 좀 만져봤구나'하셨다. 혼절은 나의 모든 자의식과 찌들린 습관을 놓아버리는 상태를 의미하며, 궁극의 경지에 이르면 가을 낙엽과 함께 잠들어 봄의 새싹과 함께 깨어난다는 '동면'을 익힐 수 있다. '동면'에 이르면 반노환동에 환골탈태하여 피부가 백옥같이 희고 온 몸에 잡병이 사라지니, 많은 이들이 이를 위해 정진하나 이 같은 경지에 이른 이는 천에 하나도 될까 말까한다. 소설가 정찬 역시 이에 경도되어 그의 소설 '깊은 강'에서 이를 심오하게 다룬 바 있으며. 관악산 아래에 있었다는 전설의 수행단체 '뿌른대라'에서는 이러한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이들이 즐비하였다. '뿌른대라'는 절대적인 시간으로 혼절의 정도를 말하는 기존의 수행법에 대해 반발하고 어떤 역경 속에서도 곤히 잠들 수 있는 개인의 능력을 중시했는데, 이들이 이를 측정하는 수단은 주로 수면 중 걸려온 휴대폰 횟수였다고 한다. 이들은 부재중 전화 스무통 쯤 기록되면 '혼절 비스무리하게 했구만'하고 판단하며 서로를 격려하고, 인간의 평균 수명을 상징하는 칠십 여 통을 넘어서면 비로소 '혼절 하셨군요'라며 성취를 축하해 준다고 한다. 앞에 언급한 심사마님 역시 '뿌른대라'의 수행원이자 한 때 대표였던 분으로, 평소 자신이 세속의 삶에 수행을 하는 한계로 인해 그 경지가 '동면'에까지 이르지 못함을 한탄하시어, 얼마전 독일로 수행을 떠나셨다고 한다.

동면에 이르는 길
이에 대해서는 수행자 내부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혼절 개량주의자들은 '동면'은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이나 산업화 이후 사람들이 빨리 사는 삶에 익숙해지고 여유를 잃어버리며 이에 이르는 길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때문에 이들은 사람들이 보다 여유를 즐기게 되고 TV와 인터넷, 광고 등 '남들보다 경제적으로 풍족한 삶을 살기 위해 더 빨리 살아라'는 메세지를 설파는 매체들과의 접촉을 줄임으로써 이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일부 도구주의자들은 보다 구체적으로 '동면'에 이르는 궁극의 아이템을 사람들이 더이상 구매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 아이템은 다름아닌 '적동면(=겨울에 입는 붉은색 면소재의 옷)'으로, 한국에는 취직 후 첫 월급을 타면 부모님께 정진의 마음을 담아 이를 선물하는 훌륭한 전통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어느샌가 겨울에 두꺼운 동물의 가죽을 옷으로 활용하면서 이러한 전통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일부 근본주의자들은 현재와 같이 물질문명의 흔적이 곳곳에 생채기를 낸 상황에서는 자연의 위대한 정기를 받기 힘들기 때문에 '적동면' 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죽음의 강'을 건너 '어라연'이라는 곳으로 가야만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풍문에 따르면 어라연은 동강 영월댐 건설로 인해 수몰지가 될 뻔한 곳으로, 지난 2000년 영월댐 건설계획이 백지화된 배경에도 시민사회를 비롯해 학계와 정계에도 거미줄처럼 뻗어있는 '혼절' 수행자들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설이있다.

동면의 상태
동물의 동면 역시 그 양태가 다양하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곰의 동면과 가장 유사하다는 설이다. (뿌른대라는 이러한 설에 반박하는 대표적인 집단이다)
'순수한 의미의 겨울잠은 몇 개월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죽은 듯이 잠자는 상태다. 물론 이런 깊은 잠이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가끔 한두 시간씩 잠에서 깨어나 물을 마시거나 덜 추운 곳으로 옮긴다. 고슴도치, 박쥐, 다람쥐 등의 겨울잠이 이렇다. 11월이 끝날 무렵이면 이 짐승들의 목과 옆구리에 두터운 지방층이 형성된다. 그것은 몸무게의 절반이 될 정도로 두텁다. 잠들기 시작하면 몸이 차츰 식어 나중에는 영하의 온도까지 내려간다. 심장 박동은 물론 핏속의 혈당량도 거의 절반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개구리나 뱀, 달팽이 등 냉형동물의 경우 영하로 떨어지면 죽는다. 곰의 겨울잠은 다르다. 겨울이 오기 전 곰은 식성을 줄이기 위해 양치 식물 잎을 먹는다. 그러다가 날씨가 추워지면 비탈에 굴을 파고 동면으로 들어가는데 체온이 29도 아래로 내려가지 않기 때문에 고슴도치나 박쥐처럼 깊은 잠은 못 잔다. 약간의 자극에도 깨어날 만큼 잠이 얕다.'

역설적으로 평소 느긋한 이보다는, 바쁜 생활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이들, 무언가에 얽매여있다고 느끼는 이들, 불면증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혼절'의 수행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들은 주로 우연한 혼절을 통해, 무한한 편안함의 경지를 경험함으로써 경이에 가득차게 되고 이에 빠져들게 된다고 한다.

끝으로 '혼절'의 수행자들이 더욱 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유일하게 언론에 보도되었던 동면에 관한 기사를 언급하며 글을 마칠까 한다.

<동면 인간, 12월에서 4월까지 잠을 자다>
-겨울이면 개구리나 뱀처럼 4개월 동안 동면한 후 깨어나는 사나이가 있다. 워싱턴 스포케인의 드와이트 플로터(54)는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는 12월에 잠이 들어 이듬해 4월에야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플로터의 동면은 20대 초반이던 60년대 초에 시작됐다. 추위 공포증과 비만이 동면의 원인이었다. 플로터는 선천적으로 추위에 약해 겨울이면 늘 집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하지만 식성은 왕성해 몸무게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그리하여 물 몇 컵만으로 겨울을 지낼 방법으로 찾은 것이 동면이었다. 운동량을 최소화할 수 잇을 뿐 아니라 외출을 못 함으로써 느끼게 되는 갑갑함도 사라질 것으로 기대되었다.
동면은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16시간 정도밖에 못 잤다.워낙 식성이 좋아 자주 먹었다. 몸무게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몸의 신진 대사를 줄여야 했다. 방법을 찾기 위해 도서관에 자주 갔다. 특히 동면하는 동물들의 생태 변화를 면밀히 들여야보았다. 플로터의동면은 해가 바뀔수록 완벽해져갔다. 지금은 일주일에 물 한 모금이 동면 중 섭취하는 음시의 전부다. 신진 대사가 매우 더디고 소화 계통의 활동이 거의 정지 상태인지라 화장실에 갈 필요도 없다.
플로터의 동면에는 가족의 세심한 배려가 뒤따른다. 동면으로 들어가기 직전인 12월 초에 크리스마스 파티를 연다. 동면으로 들어간 플로터를 보살펴주는 것도 가족들의 몫이다. 이듬해 4월 그가 깨어나면 재생의 파티를 연다.
지방 대학의 연구 대상이기도 한 플로터는 자신이 장수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매년 4개월의 휴식을 통해 육체가 싱싱해지기 때문이라는게 그 이유다. 그는 겨울잠에서 깨어나면 보다 나은 삶을 위해 그전보다 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고 고백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이 동면에 대해 보다 깊이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동면을 통해 새로운 삶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