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다와 틀리다

narre 2005. 4. 8. 10:14
생태학 수업 게시판에 올렸다 형범형의 답글이 달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 내용.

사실 '차이'와 '관용(똘레랑스)'의 개념은, 본래 한국적 전통에 깊게 자리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서구에서 수입되면서 아직 한국사회내에서 정립되지 않은 느낌이 있다. 가령 담론적 담화 상황마저 배제한채 무조건적 차이 인정을 강조하며 소통이 단절된 상황이라던가. 이런건 사실 차이의 인정이 아니라 방기에 불과한데.

암튼 한국에서 차이의 의미를 분석하면서 언어사를 살펴보는 것도 재밌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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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저번시간에도 배웠지만 이질성은 계가 진화해가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인입니다. 변화란 좋은 쪽이든 아니든 '차이'를 통해서만 가능하니까요. 하지만 한국 사회는 유난히 공동체 지향적 성향이 강해서 좋은 쪽으로는 '관계'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타나지만, 한 편에선 선 '차이'를 배제하고 집단적인 의사결정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논란의 여지가 있는 대목입니다만 이 글의 포인트는 아니니...)

이러한 성향이 언어습관에 반영된 가장 큰 예가 '다르다'라고 말해야 할 부분을 '틀리다'라고 말하는 습관 같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너무 일상화되어서(특히 글보단 대화에서) 두 용어의 차이를 알고 계신 분들도 무의식적으로 사용하시곤 합니다.

나:
오늘 문득 생각해보니, 교육의 영향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지만, 제가 '국민학교' 다닐때만 해도 문제의 대부분이 객관식이거나 단답형 주관식이었습니다.(고등학교때 서술형 문제에 당황했던 것은 이러한 교육과정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창조적인 생각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지요. 동아전과나 표준전과를 보면 유명한 시의 구절구절마다 밑줄이 그어져 있고 그 밑에 빨간 글씨로 의미하는 바가 쓰여져 있었습니다. 국어시험에 버젓이 그 의미를 물어보는 문제가 나오기 때문에 달달 외우지 않으면 좋은 성적을 받기 어려웠습니다. 가령 혼자 그 시를 음미해보며 개인사에 비추어 해석했다가는 평균 점수도 받기 어려웠던게 당시의 국어 시험이었습니다.

이러한 교육과정 내에서는 객관식은 물론이고 주관식 역시 선생님께서 '정답'이라고 지정한 답과 글자 하나라도 '다르면' '틀린' 답이 되고 말았습니다. 비슷한 뜻의 다른 답을 적어도 빨간 비가 우수수 떨어지기 일쑤였던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께 항의하러 갔다가 혼만 나고 돌아온 기억도 나구요.

입시 위주의 주입식 교육이 가진 병폐일수도 있고, 한 클래스당 학생수가 너무 많은데서 오는 채점의 어려움 탓도 있겠지요. 학생수가 많이 줄어든 요즘의 초등교육에서는 좀 더 토론과 사유가 가능한 과정이 시행되고 있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육과정 탓에 세대를 거슬러 올라갈 수록 다르다와 틀리다를 함께 사용하는 분이 많은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아이들이 말하는 걸 유심히 들어봐야겠네요. ^^

형범:
학기 시작하고는 처음 들어와봅니다. 훑어보다가 재밌는 글에 몇 자 덧붙여 봅니다.


전에 '다르다/틀리다' 얘기를 듣고, 이와 관련된 말을 한참 곱씹어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틀리다'를 긍정보다는 부정으로 쓰는 데 익숙하지만, 과연 그럴까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틀리다' 대신 '다르다'를 쓰는 것은 '다르다'에는 긍정/부정 의미가 없거나 더 나아가 긍정하는 의미가 숨어있다고 보는 까닭일까요? 과연 '틀리다'에는 부정하는 의미만 들어있을까요?

'같다-다르다'는 말에는 묶고 나누는 쓰임(분석-종합-비교-분류)이 있습니다. '다르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같음의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너는 나와 다르다'라고 할 때에는 바로 '내'가 그 기준이 되겠지요. '일본사람은 한국사람과 다르다'라고 할 때에는 일본사람을 묶는 같음과 한국사람을 묶는 같음이 있고 이를 한국사람을 기준으로 삼아 비교하는 것일 테지요. 그러나 너와 나는 나를 기준으로 할 때에는 다르지만 기준을 한국사람으로 바꾸어 일본사람과 비교할 때는 한 데 묶어 같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다름'은 '같음'을 떠나지 못합니다. 끊임없이 같음으로 다시 묶이고 나뉘어져야 합니다. 나와 너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음에도 다르게 묶이고 나뉠 수도 있습니다.

'틀리다'라는 말을 할 때는 어떻습니까. '틀림'은 묶고 나누는 데 쓰는 말은 아닙니다. 열쇠를 생각해볼까요. 열쇠를 몇 개 복사해서 나누어 가졌다고 해봅시다. 모양을 따지자면 복사한 열쇠 각각은 조금씩 다르겠죠. 하지만 모두 똑같이 문을 열고 잠글 수 있습니다. 자물쇠와 잘 맞는 열쇠인 까닭이죠. 복사한 열쇠를 또 복사해서 가진다면 아마 모양은 좀 더 달라지겠죠. 복사하고 복사한 것을 또 복사하다보면 언젠가는 문을 열 수 없는 때가 올겁니다. 자물쇠와 맞지 않는, 틀린 열쇠가 된 것이죠. 이 틀린 열쇠는 어떻게 할까요? 아마도 쓰레기통에 버리겠죠? 아무 쓸모가 없으니까요. 무엇이 바뀌었습니까. 첫번째 복사한 열쇠와 마지막으로 복사한 열쇠는 얼마나 다른가요. 어떤 열쇠를 주머니어 넣고 어떤 열쇠를 쓰레기통에 던져야 할까요. 그건 자물쇠에 넣어서 돌려보는 수밖에 없겠죠. 지금 주머니에 있는 열쇠와 쓰레기통에 있는 열쇠는 거의 다르지 않습니다. 이전 복사 열쇠와 비교하면 거의 같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문을 열수 있느냐 없느냐로 볼 때 틀린 열쇠입니다. 열쇠끼리 틀리다가 아닌, 자물쇠와 맞지 않아 틀린 열쇠라는 얘기지요. 틀림은 벗어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자물쇠-열쇠라는 예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어쩌면 열쇠는 주머니를 벗어나 쓰레기통이 아닌 다른 어딘가 자기에게 꼭 맞는 곳으로 갈 수도 있겠죠.)

이런 식으로 '다르다'와 '틀리다'라는 말을 쓴다면, 차이와 관련된 말은 '다름'보다는 '틀림'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생물이 물에서 뭍으로 나와 적응해나갔다면 그 생물은 물에 있던 다른 생물과 그저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이죠. 물에 맞추어진 몸을 가지고 물(에서의 생활)을 벗어나 전혀 다른 환경인 뭍으로 나아갑니다. 이처럼 적응과 진화를 얘기하려면 다름만큼이나 틀림에 대해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요.

'같음-다름'과 '맞음-틀림' 외에 '옳음-그름'의 말뜻을 함께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 합니다. 흔히 '넌 틀렸어'라는 말에는 '넌 옳지 않아, 넌 글렀어'라는 말뜻을 담고 있지는 않는지.

같음-다름으로는 알아챌 수 없는 변화가 있습니다. 다름을 그르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도 틀림은 그르다고 말할 수도 있지요. 물론 다름조차도 그르다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같거나 맞아야 옳은 것일까요? 다르거나 틀리면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디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까요. 초등학교 1학년의 답안지를 채점하면서 선생님은 답안과 같고 출제의도에 맞는 답뿐만 아니라 답안과 다르고 출제의도에 틀린 답을 읽으면서도 빙그레 웃고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점수를 매겨 회초리를 들며 어떤 점수 위로는 '바른/옳은' 어린이고 어떤 점수 밑으로는 '그른' 어린이라 생각하는 선생님은 아마 없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