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Daine Arbus, 1923-1971
narre
2006. 6. 28. 00:48





















다이안 아버스, 현대사진의 신화
-진동선
'사진은 비밀에 관한 비밀이다. 말하려하면 할수록 점점 알 수 없는 것이 사진이다.' 다이안 아버스는 허드슨강 너머로 지는 석양의 끝자락을 보면서 문뜩 이런 생각을 했다. 태양 빛을 잃은 샌트럴 파크는 고요해 보였다. 10대 때부터 이 언저리에서, 샌트럴 파크 서쪽으로 난 큰 창에서 늘 석양을 보면서 생각한 게 있었다. 그러한 생각은 어머니가 "이제 그만" 하고, 안쪽으로 이끌 때까지 계속 되었다. 아버스는 바라볼 수 있는 세상 끝까지, 볼 수 있는 세상 끝까지 세상의 모든 비밀을 알고 싶었다. 샌트럴 파크에 어둠이 찾아 들고, 맨해튼 스카이라인이 하나 둘씩 빛의 옷으로 갈아입을 때까지 세상의 밝음과 어두움을 그녀는 지켜보려 했다. 그녀에게 세상은 비밀의 왕국이었다. 삶의 세부, 버려진 것, 소외된 것, 상처 입은 것들까지 모두를 껴안은 왕국의 꿈은 그녀 나이 열 여덟 살 때 카메라와 더불어 구체화되었다.
다이안 아버스(Daine Arbus, 1923-1971). 백화점을 운영하는 유태인 가정의 둘째 딸로 태어나 열 다섯의 나이에 패션사진가 앨런 아버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열 여덟번째 생일 파티 후 감행한 결혼은 앨런을 사랑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왕국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고 부모에게 말한다. 남편 앨런 아버스에게는 세상을 들여다보는 카메라가 있었다. 마침내 1946년 10월. 전쟁의 두려움이 서서히 물러가고 그 자리에 투명한 웃음소리로 채워지던 때, 아버스는 결혼 5주년 기념으로 앨런으로부터 카메라를 선물 받는다. 카메라는 크고 무겁고 종종 상처를 냈으나 새로운 세상과 만나는 기쁨의 도구가 되었다. 풍족한 경제력, 남편의 화려한 직업, 그리고 자신의 뛰어난 외모는 어느 하나 부족할 게 없는 상류사회의 전형이었다. 그녀는 어느덧 남편과 함께 , , , 과 같은 주요 잡지의 패션사진가로서 자리했다. 미국인들에게 그 시절이 환멸의 시기인데 비하면 아버스 부부에게는 더 없이 화려한 시절이었다. 유명 인사들과 함께 한 만찬, 눈부시도록 화려한 파티는 그들 부부에게 일상적 삶이 되었다. 마음만 맘먹으면 유명 인사 모두를 찍을 수 있었고, 그들을 찍으면 곧 유명한 사진이 되었다.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운명처럼 한 권의 사진집이 날아든다. 바로 까르티 브래송의 <결정적 순간>이었다.
결정적 순간. 그것은 세상과 사진가가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그 옛날 허드슨강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며 꿈꾸던 비밀의 화원이었고, 삶의 작은 세부, 버려진 것, 소외된 것들의 비밀스러움을 찾고자 했던 왕국의 문이었다. 한 동안 잊었던 것이 되살아났다. 그리고서 지금까지 세상과 동떨어지게 살았던 것에 대한 반성과, 바깥 세상과 담을 쌓았던 무심함에 자각했다. 잃어 버린 눈을 되찾은 느낌이었다. 아버스는 마침내 1958년 여름, 35살의 나이로 뉴 스쿨(New School)에 입학한다. 그리고 거기서 리셋 모델(Lisette Model)이라는 인생을 결정짓는 한 여류사진작가를 만난다. 아버스의 사진세계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게 한 그녀. 그녀는 아버스에게 사진가로서의 새로운 마음가짐, 새롭게 세상을 보는 눈, 그리고 삶의 무게와 사진의 무게가 결코 틀리지 않음을 가르친다. '사진은 우리의 시각을 확장하지만 그러나 너의 방법은 걸음마 단계이다. 빛은 가장 위대한 정신의 수용체이다. 사진에서의 빛이란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사진은 빛으로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가서 비추어라. 가서 드러내라. 세상에 가려진 것, 소외된 것, 버림받은 것, 모든 상처입은 영혼들이 너의 빛을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너에게 주어진 소명이다.'
아버스는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리셋 모델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세상과 동떨어지게 살았던 자신에게 너무도 멀고 무서운 것이었다. 한 때 세상에 악마가 있다면 그것들을 한번 찍어 보겠노라고 생각은 했지만 실현 불가능한 꿈이었을 뿐이다. 그런 그녀에게 리셋 모델은 세상의 악은 보이는 않을 뿐,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악이 어쩌면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에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세상에 다가가기 위하여, 세상과 하나 되기 위하여, 그리고 세상의 비밀을 들추기 위하여 이제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고, 카메라로 세상을 비춘다면 현재의 처지로서 무엇부터 먼저 해야 할지도 혼란스러웠다. 오랜 불면의 밤 이후, 아버스는 마침내 결심한다. '패션사진으로부터 멀어지자, 세상의 금기시 된 것들을 찍어 보자.' 이제 그녀는 잡지사들이 있는 다운타운을 향하지 않았다. 대신 외곽 브루클린, 브롱스, 코니 아일랜드를 찾았다. 항상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 샌트럴 파크가 아니라 샌트랄 파크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걸어 들어갔다. 리셋 모델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생전에 어찌 이런 곳을 알았을까 생각하면서.
현대사진의 신화로 불려지는 다이안 아버스의 <기형인> 시리즈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세상이 금기시했던 것들, 드러내기를 꺼려했던 것들, 아버스는 그것 중의 하나가 기형인이라고 생각했다. 영화와 TV에서 악마의 상징으로, 저주의 대상으로 나타나는 기형인들이야말로 자신이 비추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카메라를 둘러메고 온종일 샌트럴 파크, 브롱스, 코니 아일랜드를 헤맸다. 그리고 마침내 그곳에서 거인, 난쟁이, 지체장애자들을 만났고, 온 몸에 문신을 한 흉칙한 사람들과 떠돌이 서커스 단원들도 만났다. 카메라는 꺼낼 수 없었다. 말조차 붙일 수 없었다. 건네는 자신의 미소가 억지스럽다고 느꼈고, 목소리 또한 굳어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시간은 공포와 부끄러움을 내몰았고, 그런 어느 순간 공포가 용기로, 부끄러움이 자신감으로 대체되었다. 사진가로서 경험해 보지 못한 희열이 찾아 들었다.
암울했던 1960년대. 세계는 아버스의 카메라에 들어왔다. 세상의 비밀, 어둠 속의 존재, 이것들을 세상에 드러내고자 그들을 향해 한 발짝 내딛었다. 그리고 이들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고자 낯이건 밤이건 플래시를 터트렸다. 세상 저쪽에 감춰진 어둠의 세계가 플래시 불빛을 받아 노출되었다. 그러나 어둠이 깊을수록 아버스의 현실적 삶은 무너져 갔다. 그녀가 비밀의 화원에 발을 들여놓을 때마다 현실의 삶은 파괴되어 갔다. '삶의 무게가 사진의 무게가 되기 위해, 삶이 진실하다면 사진 또한 진실할 것'이라는 리셋 모델의 말을 따르기 위해 삶의 극한으로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아버스의 현실은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아버스는 점점 더 도전적이 되어 갔다. 그것은 자신을 향한 도전이기도 했다. 버림받은 영혼들 앞에 어제의 부끄러움과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대신 그들과 아주 긴 시간 유대 관계를 통해서 그들의 삶 전체를 보게 되었다. 유태인 거인 에디 카멜(Eddie Camel)과 친해지고 그의 초대를 받아 집으로 갔을 때 그곳에서 세상의 어머니가 모두 똑 같았다는 생각을 했다. 이 세상 여자들이 임신 중일 때 꾸는 악몽은 혹시나 배속의 아이가 기형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그녀는 그 모습을 에디 카멜의 어머니에게서 보았다. 그것들은 또한 샌트럴 파크에서 정신없이 뛰어 노는 정신박약아, 지체장애자를 지켜보는 어머니들의 얼굴에서 보았고, 또한 브롱스 서커스단 주변을 서성거리는 난쟁이들의 어머니에게서도 보았다. 마흔을 넘긴 아버슨에게, 그리고 두 아이의 어머니인 아버스에게 기형인의 삶은 기형인을 넘어 이제 그들의 부모에게까지 연결되고 있었다.
유복하고 근심 없는 삶을 영위했던 아버스. 그녀에게 기형인은 사진의 소재로서 뿐만 아니라 세상의 또 다른 존재로서 자리하게 되었다. 유복함에서 비롯되었던 두려움, 부끄러움은 생의 존재를 이해하는 성찰의 눈으로 바뀌었다. 그녀가 소재로 삼았던 난쟁이, 거인, 정신박약아, 지체장애자, 레즈비언, 히피, 누디스트들은 사회가 내동댕이친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아버스의 의무감이 확대될수록 현실의 부조화는 더욱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가 보기에 기형인들은 정상 이상이었다. 육신이 기형이었을 뿐, 오히려 자신보다 더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것 같았다.
아버스는 말한다. '기형인들은 사진의 테마였지만 내게 엄청난 삶의 흥분과 의미를 주었다. 정말로 그들을 존경했다. 마치 느닷없이 불러 세워 삶의 수수께끼를 풀라고 요구하는 신화 속의 인물과도 같았다. 사람들은 일생을 통하여 외상(外傷)의 경험에 대한 끊임없는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기형인들은 그러한 외상에 의해 태어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미 삶의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이를 인식한 아버스는 60년대 중반 나체촌의 나체주의자가 되어 5년 동안 그곳 "벌거벗은 사람들"을 찍었다. 스스로 뉴저지, 펜실베이니아 나체촌에서 한 몸이 되었다. 사진은 이제 육신이 온전한, 보는 이의 안온한 존재 의식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아버스 사진은 충격과 전율 속에서도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대상들이 아무리 기묘하고 비일상적이라도 어떠한 감정도, 연민도 드러내지 않았다.
아버스는 자신의 사진이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것도 경계했다. 불행한 사람들을 찾아 나서고, 그들의 초상을 찍고, 삶의 전모를 비추지만 세상에 드러낼 만큼 아직 자신이 떳떳한가에 대해서 회의했다. 그런 그녀에게 1967년 생애 처음으로 미술관이 초대했다. 패션사진가로서 여성지와 주간, 월간지에 수없이 사진을 게재했지만 작품으로서 사진이 미술관 벽에 내 걸린 적은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뉴욕근대미술관(MoMA)이 기획초대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라는 기획전에 초대된 사람은 리 프리드랜더, 게리 위노그랜드 그리고 자신이었다. 리 프리드랜더, 게리 위노그랜드는 60년대를 주도한 세계적인 사진가였다. 그러나 자신은 그런 위치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MoMA의 초대는 정말 뜻밖이었다.
전시는 다이안 아버스를 위한 것이었다. 게리 위노그랜드의 말처럼 아버스 사진의 신화의 장이었다. 수많은 관객들이 아버스 사진 앞에 섰다. 그리고 각양의 말을 쏟아 냈다. 그러나 칭찬보다는 비난이, 예술성보다는 작가의 몰상식을 언급한 말이 더 많았다. 상심이 컸고 절망도 컸다. 그 누구도 아버스 사진의 진실에 대해서, 그녀가 걸어온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불안했던 삶의 여정에 대해서 눈길을 준 사람은 없었다. 대신 여류 사진작가라는 딱지가 독한 여자, 악취미의 여자, 부끄럼을 모르는 여자, 인간성이 기괴한 여자로까지 거론되었다. 그녀는 당당해져야 했다. 나의 사진들이 작가에게도, 모델에게도 즐거움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누군가에 의해 찍혀져야 할 사진이고, 세상에 드러나야 할 사람들이라고 말해야 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누구도 아버스처럼 추하고, 역겹고, 비정상적인 사람들을 찍은 사람이 없었다. 누구도 기형인들에게 다가서서 그들의 어두운 삶을 비춘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녀가 여성이라는 것, 부유한 환경에 살고 있다는 것에 선입견을 가졌다. 기형인의 문제는 남녀, 빈부의 문제가 아니었는데도 사람들은 작가에게 대상과의 엄격한 동질성을 요구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아버스의 사진에 열렬한 지지자들이 늘어갔다. 그리고 점차 그녀의 사진에 대한 이해와 평가도 높아져 갔다. 그 결과 구겐하임지원금을 다시 받게 되었고, 유명 예술대학으로부터 강의 초청이 쇄도했으며, 사진가로서는 처음으로 베니스 비엔날레 미국 대표로 참가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것들이 그녀를 위로하고 안온의 길로 인도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하여 절망감과 우울증을 심화시켰다.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삶의 자세도, 사생활도 점점 문란해졌다. 그 동안 묵묵히 지켜본 남편과 이혼했고 아이들과도 떨어져 살게 되었다. 어두운 그리니치 빌리지, 몽롱한 의식으로 자신의 아파트 계단을 한 걸음 오를 때마다 그녀는 사람들이 내게서 무엇을 기대하는지, 왜 사람들이 자신의 사진에 그토록 매달리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중얼거렸다. 자신은 정말 아무 것도 그들에게 보여줄 게 없다고 생각했다.
베니스 비엔날레에 초대받은 것이 부담이 되었을까? 그토록 꿈꾼 예일대학의 강의가 부담이 되었을까? 아니면 모처럼 <뉴욕타임즈>에 개재할 사진들이 부담되었을까? 이도 아니면 이제 사람들 앞에 노출된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팽팽한 긴장과 균형이 갑작스럽게 와해되었기 때문일까? 아버스는 1971년 7월 27일 자살하고 만다. 아파트 욕조에서 동맥을 끊고 스스로 세상과 절연한다. 그녀 나이 48세였다.
아버스는 오늘날 신화로 남아 있다. 당대의 모든 신화적 조건이 그녀에게 있었다. 뉴욕 5번가에 백화점이 있는 부자집 딸로서 태어나 남편과 더불어 화려한 패션사진가로서 빛을 발했던 여성.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상황에서 뜻하지 않는 외도, 사회가 금기시하고 드러내길 꺼리는 대상에 다가선 이율배반적인 행태, 그리고 그렇게 제작된 사진들이 베니스 비엔날레에 초대를 받은 것까지 모두 신화적 조건이었다. 자살은 신화를 더욱 증폭시켰다. 아버스의 죽음은 신화의 시작으로서 자살에 의해 분기된 신화는 현실에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1972년 11월 뉴욕근대미술관에서 개최된 다이안 아버스 회고전은 두달 동안 무려 25만명의 관객들이 모여들었고, 역시 그해 여름 베니스 비엔날레 미국관에는 다이안 아버스의 사진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만원을 이루었다.
아버스 신화의 원천은 그녀의 사진들이다. 그녀의 사진들은 그녀의 죽음 이후에 발표된 것이 많았고 아직도 공개되지 않는 사진들도 상당하다. 그녀의 사진들은 편안하게 바라볼 수 없는 사진들이다. 늘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거북스럽게 만드는 사진들이다. 그것이 그녀를 절망에 빠지게 했을지 모른다. 죽기 직전 그녀는 여러 사람에게 사진의 안위를 물었고, 제한적인 발표를 부탁하기도 했다. 아무도 죽음을 예상치 못했지만 예정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이미 오래 전에 그녀가 사진과 죽음을 맞바꾸었기 때문에...
글 출처: 하우포토넷 (http://www.howphot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