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liam Klein, 1929 ~

narre 2006. 6. 28. 00:49



































































































윌리엄 클라인, 뉴욕·뉴욕·뉴욕

-진동선

1954년 10월 브루클린 항구. 스무 살의 아내는 안개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마법을 연출한다. 브루클린 브릿지도 마법의 성처럼 성곽의 꼭대기만 남긴 채 안개 속으로 몸을 감춰버렸다. 갑자기 아내가 안개 속을 헤집고 나오더니 선착장 맞은편으로 몸을 돌려 총총 걸음으로 사라진다. 사라진 그 자리를 안개가 덮는다. 선착장은 미세한 움직임을 내고 있다. 아내가 사라진 쪽을 향하던 윌리엄 클라인(William Klein, 1928)은 방향을 바꿔 선착장 중간쯤에 메어진 제법 고급스러워 보이는 보트 위로 내려가 앉는다. 안개 속의 맨해튼이 저만치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한다. 그 안개 사이로 시간열차는 옛 모습을 가만히 드러낸다. 고객들과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아버지, 택시를 타기 위해 양산을 든 손을 번쩍 들어올리며 내달리는 어머니, 그리고 어깨를 부딪히며 인도를 헤집었던 어제의 나의 모습이 시간열차 속으로 빨려들어 온다. 6년 동안 잊고 있었던 유년의 풍경, 그것들이 갑작스런 그리움으로 달려오자 클라인은 오히려 더 두려움을 느꼈다.

6년만에 돌아온 뉴욕. 그러나 그 뉴욕이 어제의 뉴욕이 아니라는 데서 많이 당황했다. 파리에서 살면서 늘 꿈에 그렸고, 상상의 날개를 펼쳤던 마음속의 뉴욕. 그런데 다시 돌아와 본 뉴욕은 이미 그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것이 마음을 조급하게 했을까. 옛 흔적들을 찾고자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맨해튼 북쪽 암스테르담 가 110 스트리트에서부터 남서쪽 첼시 언저리까지 곧장 달려왔다가 점심을 먹고 동쪽 저지대, 트라이베카를 거쳐 곧바로 이곳 브루클린 항까지 내달렸다. 그러나 어디에도 예전의 맨해튼 분위기는 없었다. 그래서 두려웠다. 모든 것이 변했다는 사실에 두려운 것이 아니라, 나만 그대로 있다는 사실에 두려웠다. 벌써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은 아내의 모습을 좇는다. 코니 아일랜드까지 갈 수 있을까. 어쩌면 그곳은 옛날 그 모습으로 있을지 모르겠다. 코니 아일랜드만큼은 어릴 때 그 모습 그대로 있어줄지 모른다는 생각에 눈길은 아내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클라인은 불현듯 파리를 떠나오기 전에 만난 알렉산더 리버만의 말이 떠올랐다. 뉴욕에 가거들랑 강력하고 역동적인 거리 이미지를 좀 찍어오라는 리버만의 요청. 그의 요청은 새로운 도시사진, 가장 역동적인 뉴욕의 모습에다가 그러면서도 영화 같은, 또 그러면서도 잡지에 적합한 프레임을 원했다. 하찮은 주문으로 돌리기에는 그러나 유혹적인 면이 컸다. 그래서 모든 것이 자신 있다고, 뉴욕은 마음먹은 대로 만들 수 있다고 허풍 아닌 허풍을 치기도 했다. 뉴욕 행의 원래 목적은 너무 오랜만에 부모님께 인사드리게 위해서였다. 6년만의 귀향이었고, 그 사이에 결혼도 했기 때문에 프랑스 출신의 아내 플로린를 가족들에게 인사도 시킬 겸 결정한 여행이었고, 또 하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였다. 그 동안 그림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뉴욕에 가면 건축물을 소재로 기하학적 추상을 그리고 싶었다. 카메라를 동반했던 것은 알렉산더 리버만 때문이었다. [Vu]의 아트 디렉터인 그는 유럽여행에서 찍은 나의 사진에 의아할 정도로 좋아했다. 내가 뉴욕을 다녀온다고 하자, 오히려 나보다 더 좋아했다.

뉴욕은 리버만의 생각대로 활기찬 도시였다. 도시 전체가 살아있었고, 건물, 거리, 광고, 심지어 자동차까지도 강력하고 역동적인 그래픽 이미지를 띠고 있었다. 거리는 패션 그 자체였고, 거리는 사람들로 물결쳤다. 아무리 뉴욕이 변했어도 설마 이 정도까지 변화할거라고 생각 못했다. 그래도 여전히 갱 영화처럼 폭력 뒤의 우수, 도시의 멜랑콜릭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뉴욕은 40년대의 뉴욕, 전전(戰前)의 뉴욕이 아니었다. 바로 그때 아내가 왔다. 코니 아일랜드를 가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옷이 축축이 젖은 아내를 팔로 감싸면서 서둘러 렉싱턴의 호텔로 향했다.

지금까지 이야기는 윌리엄 클라인이 6년만에 뉴욕으로 돌아와서 너무도 변해버린 뉴욕의 모습에 충격 받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아침 일찍부터 아내를 재촉하여 유년시절 기억 속에 있는 추억의 장소를 찾아다니다 브루클린 항구까지 이른 것을 극화한 것이다. 사진사에서도 그렇고,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지식도 그렇고, 클라인이 1954-55년에 제작한 [뉴욕]은 실재와 다른 잘못 알려진 면이 많다. 뉴욕의 이미지는 클라인이 파리에서 뉴욕에 올 때 예정에 넣었던 모습도 아니고, 처음부터 그런 사진을 찍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진의 모습도 아니었다. 오히려 언급했던 것처럼 사진보다는 그림이 더 우선했었고, 보다 더 큰 이유는 프랑스 출신의 아내를 그 동안 찾아 뵙지 못한 부모님께 인사도 드릴 겸, 아내에게 뉴욕도 구경시켜줄 겸, 겸사겸사 찾으려고 했던 것인데, 떠나오기 전 [Vu]의 편집장이자 아트 디렉터이며, 곧 뉴욕 [Vogue]의 아트 디렉터를 맡게 될 알렉산더 리버만이 그에게 뉴욕사진을 부탁했기 때문에 사진 찍을 생각을 했던 것이다. 클라인의 사진 경력은 아주 일천해서 이제 사진을 시작한지 채 3년이 되지 못했다.

어쨌든 클라인은 그날 호텔로 돌아와 아내와 뉴욕 프로젝트에 대해서 논의를 한다. 서로 한 팀이 되어 아이디어와 촬영 그리고 편집방향까지 고려하는 일정을 짰다. 그리하여 먼저 리버만이 요청한대로 강력한 스트리트 풍경을 찍으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려면 아무래도 가지고 온 망원렌즈보다는 광각렌즈가 필요할 것 같았고, 정상적으로 찍을 수 없는 상황을 오히려 역으로 이용하는 방법까지 생각했다. 그래서 광각렌즈를 사고, 혹시 몰라 플래시를 샀으며, 필름은 전부 흑백 고감도로 바꿔 푸시 현상을 하기로 했다. 먼저 레이아웃에 들어갔다. 뉴욕 프로젝트의 총 촬영기간을 일단 7-8개월로 잡았다. 원래의 계획과는 달라졌지만 뉴욕에 대한 흥미와 관심이 사라지기 전에 일을 마치려면 이 정도 기간은 필요할 것으로 보았다. 사진의 모습 3가지 방향으로, 촬영지로는 일단 4개의 지역을 중심권에 넣었다. 3가지 방향에는 맨해튼의 스카이라인, 뉴욕의 밤, 그리고 스트리트 풍경이며, 4개의 지역으로는 일단 친숙한 어퍼 맨해튼(Upper East, 100 스트리트 이상), 5번 가의 업타운과 다운타운, 맨해튼 동쪽 저지대, 그리고 브루클린 지역이었다.

클라인은 다음날부터 촬영에 나섰다. 맨해튼 스카이라인은 배를 타고 찍었고, 밤의 뉴욕은 틈틈이 호텔 주변 렉싱턴가를 중심으로 찍었다. 아내와 매일 같이 찍은 필름을 현상하고 인화하여 아침에는 항상 욕조에 사진으로 가득했다. 처음 몇 주간은 어려움이 컸다. 촬영, 현상, 인화, 모든 면에서 손에 익숙하지 않았고, 사진 찍는데도 어려움이 따랐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기법상의 문제는 해결이 되었다. 광각렌즈는 손에 익었고, 대낮에도 플래시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노출, 구도, 초점 무시는 처음부터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느낌에 충실하여 찍으면 되었다. 오히려 이미지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도대체 사진들이 어떡해 나왔는지 기대감이 컸다.

촬영의 외부적 조건이 힘들었다. 언제 카메라를 빼앗기고 신체에 위험이 닥칠지 몰랐다. 그래서 비록 뉴욕이 고향이었지만 때로는 기관원처럼, 때로는 신문기자처럼, 때로는 프랑스 관광객처럼 신분을 속여가며 촬영을 했다. 클라인은 1955년 여름에 파리로 돌아왔다. 8개월간의 작업이었다. 파리로 돌아와 샘플 프린트를 했을 때, 잡지 편집에 맞게 새롭게 프린트했을 때 느낌은 이루다 말 할 수 없었다. 거친 입자, 과감한 앵글, 강력한 콘트라스트, 플래시에 의한 배경분리, 블러에 의한 강한 동감, 광각에 의한 역동적인 프레임 워크 등등, 모든 점에서 신선하고 파격적이었다. 사진에는 코니 아일랜드만 빠져 있었다. 그곳만은 찍지 않고 마음속에 그대로 간직했다. 뉴욕에서 찍은 모든 사진을 알렉산더 리버만에게 건넸고, 그는 예상대로 매우 사진에 흡족해했다. 그러나 정작 출판에 있어서는 완곡히 거절했다. 리버만의 출판권 포기는 어떤 면에서는 클라인에게 자유로운 옵션을 갖도록 하는데 도움이 되었지만 그러나 정작 자신과 교류가 있는 미국인 출판사들은 모두 출판에 부정적이었다. 어떤 출판사는 "이것이 사진이야 똥이지"라고 심하게 멸시한 사람도 있었다.

클라인은 1956년 봄 프랑스 출판사(Les Editions du Seuil)를 알게 되었는데, 그 출판사 오너가 바로 유명한 영화제작자, 감독, 작가인 크리스 마커(Chris Marker)였다. 그의 도움으로 클라인의 뉴욕은 마침내 1956년 가을 [Life Is Good and Good for You in New York: William Klein Trance Witness Revels]이란 아주 긴 제목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 책은 그해 나다르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윌리엄 클라인은 이후에도 종종 사진을 찍고, 1958년에는 로마에서 찍은 사진을 갖고 사진집 [로마](1958-59)를 출간했으며, 1964년에는 모스크바와 도쿄를 방문하여 역시 [모스크바](1964)와 [도쿄](1964)라는 제목의 사진집을 출간했다. 그러나 1961년부터는 사진보다 영화, 사진은 오로지 돈벌이가 되는 커머셜 사진, 광고사진, 패션사진에만 관심을 보였다.

윌리엄 클라인. 그는 로버트 프랭크와 더불어 현대사진의 선각자로 알려졌다. 1928년 뉴욕 맨해튼에서 헝가리계 출신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옷가게를 운영한 성직자였고, 그러나 대공황시대의 혹독한 경제적 어려움에 곤란을 겪는다. 뉴욕시립대학에 입학한 클라인은 전공이라고 할만한 학문적 성취를 이루지 못한다. 최초의 사진과의 만남은 그의 나이 열두살, 학교 근처 뉴 뮤지엄(New Museum of Modern Art) 카르띠에 브레송 사진을 보고 감동 받은 것과 어린 나이지만 FSA사진에서 받은 감동이 전부였다. 클라인은 19살 때 군대에 입대했다. 전적으로 부모의 손길로부터 벗어나려는 욕망 때문이었고, 유럽으로 가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독일에서의 짧은 복무 이후 그는 1946년부터 그토록 원했던 프랑스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군복무 중에도 소르본느 대학에서 상징주의, 연극사, 실존주의 철학을 연구했으며, 미술에도 관심을 보였다. 특히 사르트르, 까뮤, 자코메티, 장 드뷔페에 대해 심취했다.

클라인은 파리의 지적, 민주적, 예술적 분위기에서 동화되어 회화를 꿈꾸었다. 마침내 페르낭 레제로부터 짧은 기간이지만 그림을 배우고 더불어 그로부터 현대인의 삶, 특히 근대적 생활과 문화의 중요성과 산업사회에서 인간의 실존의 문제에 대해서 감화 받는다. "아름다움은 어느 곳에나 있다."는 페르낭 레제의 말에 따라 그림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데 이때 사진에 대해 비로소 눈뜨기 시작한다. 그는 또 이 무렵 삶의 안정을 찾았는데, 파리출신으로서 조각을 공부하는 아주 젊은 프랑스 여성 잔느 플로린과 만나 몽파르나스에서 가정을 꾸렸다.

1952년부터 클라인은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취미로서 시작한 사진이었다. 전시차 유럽을 다니다가 우연찮게 여기저기 추상적 소대들을 찍게되었는데 그 사진들에 대해 [Vu]의 알렉산더 리버만이 큰 호평을 한 것이다. 그때부터 자신감을 갖고서 이런저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주로 찍은 사진들은 일련의 실험적인 사진(모홀리-나기, 조지 케페스에 영향받은), 주로 예술과 일상, 현실의 모습을 겨냥했는데 리버만은 그 추상적이면서도 역동적인, 거칠면서도 디자인적인 형식에 큰 점수를 주었다. 클라인이 뉴욕을 간다고 했을 때 리버만이 그토록 강조해서 뉴욕에 가면 "사진일기" 형식의 역동적인 뉴욕의 모습을 담으라고 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윌리엄 클라인의 [뉴욕]은 사진의 역사가 말하듯이 로버트 프랭크의 [미국인]과 더불어 현대사진의 교과서로 불린다. 강력한 클로즈업, 과감한 앵글, 거친 입자, 블러, 구도무시, 노출무시, 포커스 무시, 입자 무시 등, 정통적인 사진의 규범을 모두 무시했다. 사진작가가 아니어서, 예술로서의 사진이기보다는 패션잡지를 위한 충격성을 염두에 두고 찍은 사진이라 더 자유스러웠다. 그의 촬영방법, 사진 스타일은 흔히 로버트 프랭크의 그것과 비교된다. 윌리엄 클라인의 사진이 뜨겁고 격정적이라면,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은 차고 메마르며, 윌리엄 클라인의 좀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다면, 로버트 프랭크는 한 발짝 뒤쳐지고자 했으며, 윌리엄 클라인이 다양한 구도, 다양한 앵글, 다양한 화각을 구사했다면, 로버트 프랭크는 오직 한가지 렌즈, 오직 눈 높이에서만 찍었다. 그러나 두 사람간의 절대적인 공통점이라면, 양자가 뉴욕을 미국인을 사랑했다는 점이며, 자유롭게, 느낌 그대로 그 어떤 제도와 미학과 형식에 구애받음 없이 시대를 본 그대로를 카메라에 담았다는 점이다. 두 사람의 작품이 훗날까지 현대사진의 돌파구, 새로운 시대, 새로운 어법으로서 젊은 세대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친 것도 바로 그러한 선구자적 작가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글 출처: 하우포토넷 (www.howphoto.net), 영화보다 재미있는 사진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