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 때문인가. 일찍 잠이 들었다.
기침 때문인가. 꿈을 많이 꾸었다.
관조하며 또한 직면하는 것이 중요하다. 관조함는 한발짝 떨어져서 전체 속에서 바라봄을 말한다. 그 시선은 나의 시선이기에 관조는 객관을 의미하지 않는다. 직면함은 충실함을 말한다. 선택을 회피하지 않기, 방기하지 않기. 모순되지 않는 둘의 조화가 풍성한 삶의 흐름을 만들 것이다.
언제나 나의 마음, 그 바닥에는 '어떻게 되어도 크게 상관없다'는 생각이 묵은 먼지처럼 켜켜이 쌓여있다. 그것은 허무주의일까, 허무에 대한 내 강력한 의지일까. 혹은 낙천주의일까, 하나의 절대적 의미를 버림으로써 수많은 의미를 얻게되는 것일까. 그 실체는 생각이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허나 발현 역시 언제나 양가적이다. 때론 모두지 벗어날 수 없는 질퍽한 슬픔으로(아마도 그건 슬픔은 아닐게다, 슬픔보다 훨씬 탁도 높고 끈적하며 잡스러운 어떤 것), 그리고 때론 도무지 멈출 수 없는 유쾌한 웃음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는 관념적 앎과 깨달음이 괴리되기 때문일까. 그 역시 아니다. 생각은 그렇게 질적으로 다른 두 차원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삶이라는 찌개 속에 갖은 양념들처럼 이미 녹아들어 있어서, 그리하여 비로소 삶의 맛을 내는, 구분조차 무의미한 그런 것에 가깝다. 뭐 그런거다. 그런고로 나는 이렇게 외친다.
아, 나의 삶은 끓고 있노라. 보글보글하는 우렁찬 소리를 내며. 숭늉은 찌개를 다 비운 후에나 주시구려.
기침 때문인가. 꿈을 많이 꾸었다.
관조하며 또한 직면하는 것이 중요하다. 관조함는 한발짝 떨어져서 전체 속에서 바라봄을 말한다. 그 시선은 나의 시선이기에 관조는 객관을 의미하지 않는다. 직면함은 충실함을 말한다. 선택을 회피하지 않기, 방기하지 않기. 모순되지 않는 둘의 조화가 풍성한 삶의 흐름을 만들 것이다.
언제나 나의 마음, 그 바닥에는 '어떻게 되어도 크게 상관없다'는 생각이 묵은 먼지처럼 켜켜이 쌓여있다. 그것은 허무주의일까, 허무에 대한 내 강력한 의지일까. 혹은 낙천주의일까, 하나의 절대적 의미를 버림으로써 수많은 의미를 얻게되는 것일까. 그 실체는 생각이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허나 발현 역시 언제나 양가적이다. 때론 모두지 벗어날 수 없는 질퍽한 슬픔으로(아마도 그건 슬픔은 아닐게다, 슬픔보다 훨씬 탁도 높고 끈적하며 잡스러운 어떤 것), 그리고 때론 도무지 멈출 수 없는 유쾌한 웃음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는 관념적 앎과 깨달음이 괴리되기 때문일까. 그 역시 아니다. 생각은 그렇게 질적으로 다른 두 차원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삶이라는 찌개 속에 갖은 양념들처럼 이미 녹아들어 있어서, 그리하여 비로소 삶의 맛을 내는, 구분조차 무의미한 그런 것에 가깝다. 뭐 그런거다. 그런고로 나는 이렇게 외친다.
아, 나의 삶은 끓고 있노라. 보글보글하는 우렁찬 소리를 내며. 숭늉은 찌개를 다 비운 후에나 주시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