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방

2005. 1. 12. 16:00 |


힘겨운 하루가 끝나고 역 앞에 줄줄이 늘어선 술집을 따라 오 분쯤 터벅거리며 걸어가면, 작년 최신가요까지 밖에 없는 허름한 노래방 건물 옥상에 내 방이 있다. 아니, 내 집이 있다.

그 집은 바닥에 자리를 펴고 누우면 십 분마다 덜컹거리는 지하철 소리가 들리고, 아주 가끔 그 소리가 지겨워 음악을 크게 틀어 놓으면 아래층 주인집에서 금새 고함소리가 들려오는 그런 집이다.
어디 그 뿐인가. 겨울이면 보일러가 터져 주인집 신세를 지고, 여름엔 양철로 만든 간이 화장실이 한증막처럼 더워 제대로 볼 일을 보기도 힘든 그런 집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 집엔 이런 사소한 불편함쯤은 가볍게 웃어 버릴 수 있는 넓은 정원이 딸려있다. 비록 새파란 잔디가 일정하게 자라난 보기좋은 정원은 아니지만, 우울한 날엔 맥주 한 캔을 비우곤 아무렇게나 툭 던져버릴 수도 있고, 햇살이 좋은 날엔 뽀송뽀송하게 옷도 말릴 수 있고, 가끔 사랑하는 사람들이 찾아오면 퍼질러 앉아 삼겹살을 구워 먹을 수 있는 그런 두 평짜리 시멘트 바닥 정원이 있다.

바람이 매서운 날 흰색 런닝 셔츠바람으로 정원에 나가면, 저 앞엔 제각각의 하루를 짊어진 표정으로 지하철을 타고 스쳐가는 사람들이,저 아래엔 비틀거리며 어깨동무를 하고 걸어가는 한 무리의 남자들이, 그리고 그 옆엔 썰렁한 야외석에 멍하니 홀로 앉아있는 곱창집 아주머니가 보인다.

나는 한참 동안 그들을 바라본다.
스쳐가는 세상과 걸어가는 세상과 멈춰있는 세상을 본다.
그리고 그 세상들이 실고 온 희미한 알콜 냄새, 땀 냄새, 축축한 곰팡이 냄새에 취한다. 그렇게 맥주 없이도 나는 잔뜩 취해 혼자 울고 혼자 웃고 또 혼자 주정을 한다. (물론 안주론 맥주를 먹는다.)

그러다 그날의 막차가 지나가고 그 쓸쓸한 기계가 몰고온 새벽의 찬바람이 뺨을 할퀴면, 그제서야 나는 무언가 생각난 사람처럼 쿵쾅거리며 방으로 뛰어 들어가 미친듯이 글을 쓰는 것이다.

이불을 꼭꼭 뒤집어 쓰고, 인터넷도 되지 않는 구식 노트북을 꺼내 누구도 보지않을 글을 빼곡히 적어가다 나는 잠이 든다.

아침이 되면 이불 사이로 빼곰히 드러난 내 발 위로 조그만 창문을 타고 넘어온 햇살이 비치고, 바람과 노느라 정원을 밤새 굴러다닌 빈 맥주캔은 그제서야 지쳐 잠이 들고, 투박한 테라스에 고여있던 흥건한 눈물 자국, 웃음 자국, 욕설 자국은 흔적도 없이 말라버린다.

그것이 내 하루의 끝이자 시작.

나의 이십대는 그 방과 함께였고, 그 방을 사랑했고, 그 방이길 원했다.

나는 언제나 그렇게 생각해왔다
Posted by nar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