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에 내려왔으니 꽤 되었군. 시간은 슬금슬금 잘도 지나간다. 진호형과의 광기 어린 모험에서 입은 상처는 이제 겨우 치유되었고, 새롭게 흡혈귀들과의 혈투에서 얻은 치욕적인 상처만이 온 몸을 장식하고 있다. 생각해보니 근래에 이것저것 상처가 끊이질 않는다. 정말 단련되고 있는걸까?
생각해보면 서글픈건 망각이 아니라 망각의 망각이다. 건희가 종종 운명을 인식된 우연이라 표현하는 것은 여기에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망각이란건 어쩌면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에야 쓸 수 있는 말로써, 이미 그 단어를 쓰는 순간에는 망각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다.
기억이란 녀석은 가만히 한자리에 앉아서 고민한다고 떠올릴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밀란쿤데라의 '천사들'이란 단편을 보면 남편과 사별한 여주인공이 한 남자의 인도로 이르게된 진흙강 제방에서 잊고 있었던 남편과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고는 '기억은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찾고자 하면 돌아다녀야 한다. 그래서 그 기억의 파편들이 숨어 있는 곳으로 부터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라고 설파하는데 참으로 맞는 말 같다.
좀 더 덧붙이면 개인적으로는 기억의 양은 한정적인가 하는 의문이 남아있다. 가령 어느 곳 어느 물건에서 망각했던 것을 떠올려낸다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다면, 그 장소 그 물건에 맺혀있던 기억의 입자들은 내 머리속으로 옮겨와버려 더 이상 그 장소와 물건은 기억 파편의 보관소로서의 효력을 상실해 버리는 것일까 하는 의문. 물론 대부분이 '아니다. 다시 그 장소에 가보면 또 그 기억이 나질 않겠느냐'라고 대답할 터이지만 이때 말하는 기억은 전자와는 질적으로 다른 성질의 것이 아닐까 하는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든 의문을 가지고 있다.
혹은 마치 감가상각비처럼 사용횟수에 비례해 줄어드는 것일까.
기억을 되찾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작업일까? 물론 어떤 경우는 우연 혹은 필연에 의한 의지와는 그다지 상관없는 성질의 발견이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인간은 기억을 되찾고 싶어하는 욕망을 지니고 그러한 의지를 행사한다. 나이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처럼 기억을 생존에 필요한 음식으로 비유하기도 하고, 개인의 정체성을 이루는 가장 큰 요소로 기억을 받아들이기도 하는 것이다. 왜?
이러한 기억의 경우 대부분이 토마스 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처리된' 기억이다. 그것의 사실여부와는 미약한 관계를 맺는, 그리고 다른 기억들에 대한 외면과 뭉갬을 통해 가공된 녀석인 것이다.( 아직 가치판단은 들어가지 않았다) 여기서 위의 질문,즉 기억을 되찾는 작업의 의미가 편의성 혹은 필요성에 있다면 분명히 이러한 처리의 과정은 정당화 됨과 동시에 그것에 대한 강력한 요구가 뒤따르게 된다. (때문에 사진이란 매체가 등장했고, 현재까지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하루끼가 그토록 자주 이야기 하는 '편의성'의 무서움에 놀라게 된다. 개인의 차원에서 도대체 편의적이지 않은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 이 편의성이란 단어와 상대성이란 단어는 묘하게 차이를 가지는 듯 한데 그 지점을 구체적으로 짚어내기가 힘이 든다.) 혹은 포스트구조주의에서 말하는 '계열화'를 떠올리기도 한다. 마치 바둑판의 눈금처럼 한정된 곳(구조)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건들. 하지만 한 바둑알이 놓인곳(하나의 사건이 발생한 곳) 주변에 어떤 바둑돌들이 놓이게 되느냐, 즉 다른 사건들과 어떻게 계열화 되느냐에 따라 그 사건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사건의 계열화. 으헉. 왜 갑자기 이 녀석이 튀어나왔지.
생각이 꽁지를 무는군. 이러다보면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린다. 완전히. 무슨 동기에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는건지 까먹게 되는 것이다
200207
생각해보면 서글픈건 망각이 아니라 망각의 망각이다. 건희가 종종 운명을 인식된 우연이라 표현하는 것은 여기에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망각이란건 어쩌면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에야 쓸 수 있는 말로써, 이미 그 단어를 쓰는 순간에는 망각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다.
기억이란 녀석은 가만히 한자리에 앉아서 고민한다고 떠올릴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밀란쿤데라의 '천사들'이란 단편을 보면 남편과 사별한 여주인공이 한 남자의 인도로 이르게된 진흙강 제방에서 잊고 있었던 남편과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고는 '기억은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찾고자 하면 돌아다녀야 한다. 그래서 그 기억의 파편들이 숨어 있는 곳으로 부터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라고 설파하는데 참으로 맞는 말 같다.
좀 더 덧붙이면 개인적으로는 기억의 양은 한정적인가 하는 의문이 남아있다. 가령 어느 곳 어느 물건에서 망각했던 것을 떠올려낸다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다면, 그 장소 그 물건에 맺혀있던 기억의 입자들은 내 머리속으로 옮겨와버려 더 이상 그 장소와 물건은 기억 파편의 보관소로서의 효력을 상실해 버리는 것일까 하는 의문. 물론 대부분이 '아니다. 다시 그 장소에 가보면 또 그 기억이 나질 않겠느냐'라고 대답할 터이지만 이때 말하는 기억은 전자와는 질적으로 다른 성질의 것이 아닐까 하는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든 의문을 가지고 있다.
혹은 마치 감가상각비처럼 사용횟수에 비례해 줄어드는 것일까.
기억을 되찾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작업일까? 물론 어떤 경우는 우연 혹은 필연에 의한 의지와는 그다지 상관없는 성질의 발견이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인간은 기억을 되찾고 싶어하는 욕망을 지니고 그러한 의지를 행사한다. 나이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처럼 기억을 생존에 필요한 음식으로 비유하기도 하고, 개인의 정체성을 이루는 가장 큰 요소로 기억을 받아들이기도 하는 것이다. 왜?
이러한 기억의 경우 대부분이 토마스 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처리된' 기억이다. 그것의 사실여부와는 미약한 관계를 맺는, 그리고 다른 기억들에 대한 외면과 뭉갬을 통해 가공된 녀석인 것이다.( 아직 가치판단은 들어가지 않았다) 여기서 위의 질문,즉 기억을 되찾는 작업의 의미가 편의성 혹은 필요성에 있다면 분명히 이러한 처리의 과정은 정당화 됨과 동시에 그것에 대한 강력한 요구가 뒤따르게 된다. (때문에 사진이란 매체가 등장했고, 현재까지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하루끼가 그토록 자주 이야기 하는 '편의성'의 무서움에 놀라게 된다. 개인의 차원에서 도대체 편의적이지 않은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 이 편의성이란 단어와 상대성이란 단어는 묘하게 차이를 가지는 듯 한데 그 지점을 구체적으로 짚어내기가 힘이 든다.) 혹은 포스트구조주의에서 말하는 '계열화'를 떠올리기도 한다. 마치 바둑판의 눈금처럼 한정된 곳(구조)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건들. 하지만 한 바둑알이 놓인곳(하나의 사건이 발생한 곳) 주변에 어떤 바둑돌들이 놓이게 되느냐, 즉 다른 사건들과 어떻게 계열화 되느냐에 따라 그 사건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사건의 계열화. 으헉. 왜 갑자기 이 녀석이 튀어나왔지.
생각이 꽁지를 무는군. 이러다보면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린다. 완전히. 무슨 동기에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는건지 까먹게 되는 것이다
20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