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

2005. 3. 8. 07:32 |
예상보다 공사가 길어져서 오늘까지 화장실을 쓸 수 없게 되었다.
덕분에 목욕탕엘 가게 되었는데, 새벽부터 목욕가방을 들고 터벅터벅 걸어가다보니 어릴적 기억이 많이 떠올랐다.

어릴적에 나는 목욕탕 가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는데, 생각해보면 목욕탕 뿐 아닐 씻는 것 자체를 별로 좋아하진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아버지는 굉장히 깔끔하신 분으로, 집안청소가 취미생활이며 하루에 몇 번의 샤워는 예삿일에다 일요일마다 꼬박꼬박 목욕탕을 찾는 위인이시니 그 등쌀에 나의 땀에 젖은 피부는 괴로웠던 것이다.

당시엔 평일이 주말같은 하루들이었지만 그래도 일요일 아침엔 TV에서 디즈니 만화를 방영해 주었기 때문에, 나는 일요일이면 일찍 일어나서 설레는 마음으로 TV 앞에 앉아있곤 했다. 오리 스크루지 할아버지니 다람쥐 형사니 하는 등장인물들이 나오는, 지금은 제목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만화들이 그때는 어찌나 재미있는지 나는 평소에도 디즈니 만화의 주제가를 흥얼거리며 일요일을 기다렸었다. 고요한 일요일 아침에 거실에 느긋하게 누워 엄마가 끓여주는 보글보글 라면을 기다리며 디즈니 만화를 감상하는 일은 어린 나의 주말 로망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나의 로망도 아버지의 한 마디에 산산히 부서지기 예사였으니, 아버지는 꼭 만화가 중반에 달할 즈음 '영래야 목욕가자'를 외치시곤 했다. 그러면 나는 못 들은척 만화에 집중하곤 했지만, 재차 반복되는 말씀에 당할 수가 있나, 생때를 부려 겨우 만화가 끝날 때까지의 유예시간을 버는 것이 고작이었다.

씰룩이는 얼굴로 집을 나서면 아버지는 하늘색 목욕가방을 언제나 내게 맡기셨다. 프로스펙스였던가, 나이키였던가. 아무튼  그 하늘색 가방을 불만에 가득찬 표정으로 졸래졸래 아버지를 따르던 기억은 무척 생생해서, 그 가방은 마치 아버지의 스킨냄새처럼 오래오래 '아버지'의 이미지로 내게 남아있다.

일요일의 한적한 동네길은 한가닥 훈풍만이 유일한  


비락식혜, 칠성사이다.
먹어봄.

오랜만에 목욕탕에 갔다.
요즘 목욕탕엔 사우나도 있고, 찜질방도 있고 헬스까지 있는 경우도 많지만,
여전히 나는 '목욕탕'이란 단어가 친근하다.

열심히 박피하여 새사람으로 태어나자, 는 구호하에 made in italy 라는 명칭을 가진 타월로 열심히 밀다보니, 술술 잘 가다가 등에서 막힌다. 주위를 둘러봤는데 등밀이 기계가 없다. 부산에만 있다던데, 진짜 그런가보다.

아버지 생각이 난다.
울 아부지의 두가지 로망.
아들이랑 낚시가기, 아들이랑 목욕탕가기.

죄송하게도 난 둘 다 싫어했다. 아부지는 꼭 일요일 아침에 내가 좋아하는 디즈니 만화를 보고 있으면 목욕가방을 들고 나를 꼬드겼단 말이지. 구피가족과 다람쥐 특공대를 버리고 아부지 뒤를 졸래졸래 따를 때면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Posted by nar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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