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과외를 가는 길에 어디론가 외출을 하는 가족을 보았다.
아니, 조금 정확히 말하면 내가 본 것은 그 중의 한 아이다.
그 아이는 메뚜기처럼 폴짝 거리며 뛰어 놀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냥 뛰는 게 아니라 빨간 보도 블록만을 정확히 밟으며 가족의 뒤를 쫓고 있었다. 아침나절부터 쏟아진 비로 인해 바닥엔 얕은 웅덩이가 고여 있었고, 아이의 발이 닿을 때마다 참방참방하는 잔잔한 소리가 났는데 그 소리가 듣기 좋았던 탓인지, 아이의 웃는 모습이 귀여웠던 탓인지, 그것도 아니면 빨간 보도 블록만 꼭꼭 디디는 철저한 모습에 감탄해서인지, 여하튼 나는 한참이나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의 어머니로 짐작되는 이는 갈 길이 급한지 연신 아이를 재촉했지만 아이는 어지간히 놀이에 집중을 한 뒤인지라 발걸음이 더딜 수 밖에 없었다.
한참을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하는 흔하디 흔한 감상에 젖어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문득 그것이 그리 옛 시절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의 기준을 정하고 그것으로 삶과 사람, 그리고 세상을 나누어 그 안의 것만을 꼭꼭 밟아대던 시절.그리고 그런 일들, 그렇게 기준을 정하고 이상향을 그리며 그 안을 꼭꼭 디디던 일이 뜀박질 놀이처럼 즐겁기만 하던 시절은 바로 얼마전 이야기 아니었을까. 물론 지금이기에 '그땐 철저했어' 라고 말하는 것이리라만은, 미화되지 않은 과거가 어디있으랴.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으려니 이내 씁쓸해지고 만다. 어느새 그런 것들, 댓가없는 놀이의 즐거움과 어쩌면 사소하지만 철저했던 기준들이 희미해지고 지금 내가 딛고 있는 이곳이 아스팔트 길인지 흙길인지, 빨간 보도 블럭인지 회색 시멘트 길인지 신경쓰지 않게 된 탓이다. 뭐, 좋게 말하려면 다양성의 존중이니 하는 말들을 주절댈 수도 있겠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봐도 그건 말이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알 수 있다. '다양성'이란 이것과 저것의 경계를 전제한 말, 경계없인 존재할 수 없는 말인데 지금의 문제는 그 경계 자체의 흐릿함에서 온 것이니까.
자신이 디딘 곳에 대한 평가가 없다면, 그 기준이 흐릿하기 그지 없다면 이제는 발의 감촉으로 그것을 알 수 밖에 없다.그렇게 몸으로 느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양말이니 신발이니 하는 것들에 겹겹히 둘러쌓여, 숨막히는 답답함 속에 신음하고 있는 이 시대의 발들이 어찌 그것을 느낄 수 있을까. 그것들은 그저 걷고 있음을 느낄 뿐이다. 바닥이 사라지고 허공을 바둥대고 있을 때에도 어쩌면 발들은 걷고 있다 느낄지도 모른다. 바둥댐을 지나 바닥으로 추락하여 쇄골이 으스러진 뒤에도 어쩌면 발들은 걷고 있다 느낄지도 모른다. 습관이 그만큼 무서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의 발들은 예전의 놀이를 잊고 그 규칙마저 잊었다. 아니, 어쩌면 잃었다. 그리고 잃었다는 것마저 잊어갈 때 쯤엔 어느덧 내 발엔 하얀 흰 양말에 매끈한 검은 구두가 신겨져 있지나 않을까. 곧 양말엔 구멍이 뚫리고 구두는 헤어져 밑창이 떨어질 거란 걸 짐작도 못 한채, 반짝이는 광채에 눈이 휘둥그래져 웃음짓지나 않을까.
끔찍하군.
스스로에게 변명할 수 없다면 남은 것은 평가와 반성과 행동이다.
그러기 위해 잠시 바닥에 앉아 예전의 놀이를 떠올리며 지금 디딘 곳과 다음에 뜀박질을 할 곳을 생각한다면, 그것만은 나를 위한 변명이 아니길. 더이상은 지리하니까. 지겨우니까.
어느새 아이는 시야에서 사라졌고 나는 서둘러 과외집에 들어갔다.
신발을 벗으려니 아래에 구멍이 나서인지 양말이 축축해 여간 찝찝한게 아니다. 찝찝하면 그것으로 그만이지만 남의 집이다보니 민망하기까지 하다. 양말이니 뭐니 다 벗고 샤워기 한 번 틀어제낀후에 맨발로 철썩거리며 걷고 싶다. 것도 아니면 새로 신을 살까, 그러려면 돈이 얼마나 들까 잠시 생각을 하다 과외집 어머니의 인사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린다
아니, 조금 정확히 말하면 내가 본 것은 그 중의 한 아이다.
그 아이는 메뚜기처럼 폴짝 거리며 뛰어 놀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냥 뛰는 게 아니라 빨간 보도 블록만을 정확히 밟으며 가족의 뒤를 쫓고 있었다. 아침나절부터 쏟아진 비로 인해 바닥엔 얕은 웅덩이가 고여 있었고, 아이의 발이 닿을 때마다 참방참방하는 잔잔한 소리가 났는데 그 소리가 듣기 좋았던 탓인지, 아이의 웃는 모습이 귀여웠던 탓인지, 그것도 아니면 빨간 보도 블록만 꼭꼭 디디는 철저한 모습에 감탄해서인지, 여하튼 나는 한참이나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의 어머니로 짐작되는 이는 갈 길이 급한지 연신 아이를 재촉했지만 아이는 어지간히 놀이에 집중을 한 뒤인지라 발걸음이 더딜 수 밖에 없었다.
한참을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하는 흔하디 흔한 감상에 젖어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문득 그것이 그리 옛 시절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의 기준을 정하고 그것으로 삶과 사람, 그리고 세상을 나누어 그 안의 것만을 꼭꼭 밟아대던 시절.그리고 그런 일들, 그렇게 기준을 정하고 이상향을 그리며 그 안을 꼭꼭 디디던 일이 뜀박질 놀이처럼 즐겁기만 하던 시절은 바로 얼마전 이야기 아니었을까. 물론 지금이기에 '그땐 철저했어' 라고 말하는 것이리라만은, 미화되지 않은 과거가 어디있으랴.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으려니 이내 씁쓸해지고 만다. 어느새 그런 것들, 댓가없는 놀이의 즐거움과 어쩌면 사소하지만 철저했던 기준들이 희미해지고 지금 내가 딛고 있는 이곳이 아스팔트 길인지 흙길인지, 빨간 보도 블럭인지 회색 시멘트 길인지 신경쓰지 않게 된 탓이다. 뭐, 좋게 말하려면 다양성의 존중이니 하는 말들을 주절댈 수도 있겠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봐도 그건 말이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알 수 있다. '다양성'이란 이것과 저것의 경계를 전제한 말, 경계없인 존재할 수 없는 말인데 지금의 문제는 그 경계 자체의 흐릿함에서 온 것이니까.
자신이 디딘 곳에 대한 평가가 없다면, 그 기준이 흐릿하기 그지 없다면 이제는 발의 감촉으로 그것을 알 수 밖에 없다.그렇게 몸으로 느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양말이니 신발이니 하는 것들에 겹겹히 둘러쌓여, 숨막히는 답답함 속에 신음하고 있는 이 시대의 발들이 어찌 그것을 느낄 수 있을까. 그것들은 그저 걷고 있음을 느낄 뿐이다. 바닥이 사라지고 허공을 바둥대고 있을 때에도 어쩌면 발들은 걷고 있다 느낄지도 모른다. 바둥댐을 지나 바닥으로 추락하여 쇄골이 으스러진 뒤에도 어쩌면 발들은 걷고 있다 느낄지도 모른다. 습관이 그만큼 무서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의 발들은 예전의 놀이를 잊고 그 규칙마저 잊었다. 아니, 어쩌면 잃었다. 그리고 잃었다는 것마저 잊어갈 때 쯤엔 어느덧 내 발엔 하얀 흰 양말에 매끈한 검은 구두가 신겨져 있지나 않을까. 곧 양말엔 구멍이 뚫리고 구두는 헤어져 밑창이 떨어질 거란 걸 짐작도 못 한채, 반짝이는 광채에 눈이 휘둥그래져 웃음짓지나 않을까.
끔찍하군.
스스로에게 변명할 수 없다면 남은 것은 평가와 반성과 행동이다.
그러기 위해 잠시 바닥에 앉아 예전의 놀이를 떠올리며 지금 디딘 곳과 다음에 뜀박질을 할 곳을 생각한다면, 그것만은 나를 위한 변명이 아니길. 더이상은 지리하니까. 지겨우니까.
어느새 아이는 시야에서 사라졌고 나는 서둘러 과외집에 들어갔다.
신발을 벗으려니 아래에 구멍이 나서인지 양말이 축축해 여간 찝찝한게 아니다. 찝찝하면 그것으로 그만이지만 남의 집이다보니 민망하기까지 하다. 양말이니 뭐니 다 벗고 샤워기 한 번 틀어제낀후에 맨발로 철썩거리며 걷고 싶다. 것도 아니면 새로 신을 살까, 그러려면 돈이 얼마나 들까 잠시 생각을 하다 과외집 어머니의 인사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