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일기 2005. 10. 12. 13:20 |
얼마전에 본 쿤데라의 '정체성'이란 소설에 그런 대목이 나온다.
아이가 다섯살에 죽어 버린 뒤에, 그리 사랑하지 않던 남편과도 이혼하고, 대가족에다 섹스 중의 신음소리까지 서로 듣고 살만큼 지긋지긋하게 사생활없는 시댁에서도 나와 독립한 여성이 아이의 묘 앞에서 하는 이야기.
아이의 죽음에 슬퍼하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으면서도, 그 죽음에서 묘한 해방감을 느끼는 미안함을 털어놓는 대목이었는데,
재밌었던건 그거였다.

아이를 통해서 결국 이 지긋하고 부조리한 세상을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는, 하지만 지금은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환경문제를 이야기할 때 항상 등장하는 '미래세대'란 단어의 힘.

결국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 인간은 세상을 사랑할 수 없는 것 아닐까.
그게 가족이든, 연인이든, 자식이든, 친구든간에, 인간은 구체적인 사랑의 대상을 통해서, 그 관계를 통해서 존재를 긍정하고 세상을 긍정할 수 있다. 긍정한다는건 거대한 강의 흐름을 보는 것과 같아서, 그 안의 더러움을 똑바로 바라보면서도 그 전체의 흐름이 지닌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 따라서 자아에 갇히고 자신의 논리로만 세상을 분석,분류하는 이는 그 흐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오직 논리의 완성을 위한 비판만 있을 뿐이다.
때문에 이제 난 구체적인 대상이 빠진 인류애의 진정성을 믿지 않는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한다.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고 긍정하지 못하는 이는, 집착하고 비뚤어진 감정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 뿐이다. 대상을 오롯이 보지 못하고, 감정에 휘둘리며, 편안해지지 못한다. 편안하지 못한건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면 대상도 편안해질 수 없다. 대상에 대한 집착은 결국 자신에 대한 집착이다. 집착과 사랑의 가장 큰 차이는 자유로움에 있다. 자신에게 집착하는 이는 자신을 놓지 못하고 속박되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이는 그 사랑을 통해 자신을 놓고 자유로울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자유로운 이, 스스로 홀로 선 이만이 타인을, 세상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당연한 듯 생각해 왔으나, 어느순간 절절하게 느껴지는 깨달음.

나-너-세상이 사랑으로 관계하며 자유로울지니 그것이 아름다움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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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에리히 프롬 식의 결론. 소유와 결별한 사랑이, 달의 뒤편, 그 가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세상의 어둠에서는 허울좋은 자기 위안 정도로 치부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엔 물적 조건, 외적 조건, 성격 차, 기질 차, 기타 등등의 이유로 사랑하는 대상에게 사랑받을 수 없었던 수많은 이들이 있고, 때문에 자신조차 사랑할 수 없는 수 많은 이들이 있다.  또한 세상의 사랑 대부분은 집착과 애증과 멸시가 구분조차 되지 않게 얽혀버린 혼탁물 덩어리이며, 그 속에서 뒹굴어보지 않은 이는 속세의 사랑이 아닌 깊고 깊은 산 속의 사랑만을 이야기 할 수 있을 뿐인 것도 맞는 말이다.

때문에 존재론적 사랑은 때론 스스로의 감정에서 도망감을, 모두가 편하고 안전한 세계로 숨어버림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 절절하고 질퍽하고 더럽고 끈적하고 징한 애정의 강을 그 전체로 바라 볼 수 있을 때, 바로 그 곳은 집착을 벗어난 사랑이 있는 곳이기도 함을 믿는다.

결국 그건 자신만 아는 것. 항상 깨어있는 자만이 아는 것.
Posted by nar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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