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본 쿤데라의 '정체성'이란 소설에 그런 대목이 나온다.
아이가 다섯살에 죽어 버린 뒤에, 그리 사랑하지 않던 남편과도 이혼하고, 대가족에다 섹스 중의 신음소리까지 서로 듣고 살만큼 지긋지긋하게 사생활없는 시댁에서도 나와 독립한 여성이 아이의 묘 앞에서 하는 이야기.
아이의 죽음에 슬퍼하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으면서도, 그 죽음에서 묘한 해방감을 느끼는 미안함을 털어놓는 대목이었는데,
재밌었던건 그거였다.
아이를 통해서 결국 이 지긋하고 부조리한 세상을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는, 하지만 지금은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환경문제를 이야기할 때 항상 등장하는 '미래세대'란 단어의 힘.
결국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 인간은 세상을 사랑할 수 없는 것 아닐까.
그게 가족이든, 연인이든, 자식이든, 친구든간에, 인간은 구체적인 사랑의 대상을 통해서, 그 관계를 통해서 존재를 긍정하고 세상을 긍정할 수 있다. 긍정한다는건 거대한 강의 흐름을 보는 것과 같아서, 그 안의 더러움을 똑바로 바라보면서도 그 전체의 흐름이 지닌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 따라서 자아에 갇히고 자신의 논리로만 세상을 분석,분류하는 이는 그 흐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오직 논리의 완성을 위한 비판만 있을 뿐이다.
때문에 이제 난 구체적인 대상이 빠진 인류애의 진정성을 믿지 않는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한다.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고 긍정하지 못하는 이는, 집착하고 비뚤어진 감정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 뿐이다. 대상을 오롯이 보지 못하고, 감정에 휘둘리며, 편안해지지 못한다. 편안하지 못한건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면 대상도 편안해질 수 없다. 대상에 대한 집착은 결국 자신에 대한 집착이다. 집착과 사랑의 가장 큰 차이는 자유로움에 있다. 자신에게 집착하는 이는 자신을 놓지 못하고 속박되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이는 그 사랑을 통해 자신을 놓고 자유로울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자유로운 이, 스스로 홀로 선 이만이 타인을, 세상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당연한 듯 생각해 왔으나, 어느순간 절절하게 느껴지는 깨달음.
나-너-세상이 사랑으로 관계하며 자유로울지니 그것이 아름다움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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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에리히 프롬 식의 결론. 소유와 결별한 사랑이, 달의 뒤편, 그 가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세상의 어둠에서는 허울좋은 자기 위안 정도로 치부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엔 물적 조건, 외적 조건, 성격 차, 기질 차, 기타 등등의 이유로 사랑하는 대상에게 사랑받을 수 없었던 수많은 이들이 있고, 때문에 자신조차 사랑할 수 없는 수 많은 이들이 있다. 또한 세상의 사랑 대부분은 집착과 애증과 멸시가 구분조차 되지 않게 얽혀버린 혼탁물 덩어리이며, 그 속에서 뒹굴어보지 않은 이는 속세의 사랑이 아닌 깊고 깊은 산 속의 사랑만을 이야기 할 수 있을 뿐인 것도 맞는 말이다.
때문에 존재론적 사랑은 때론 스스로의 감정에서 도망감을, 모두가 편하고 안전한 세계로 숨어버림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 절절하고 질퍽하고 더럽고 끈적하고 징한 애정의 강을 그 전체로 바라 볼 수 있을 때, 바로 그 곳은 집착을 벗어난 사랑이 있는 곳이기도 함을 믿는다.
결국 그건 자신만 아는 것. 항상 깨어있는 자만이 아는 것.
아이가 다섯살에 죽어 버린 뒤에, 그리 사랑하지 않던 남편과도 이혼하고, 대가족에다 섹스 중의 신음소리까지 서로 듣고 살만큼 지긋지긋하게 사생활없는 시댁에서도 나와 독립한 여성이 아이의 묘 앞에서 하는 이야기.
아이의 죽음에 슬퍼하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으면서도, 그 죽음에서 묘한 해방감을 느끼는 미안함을 털어놓는 대목이었는데,
재밌었던건 그거였다.
아이를 통해서 결국 이 지긋하고 부조리한 세상을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는, 하지만 지금은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환경문제를 이야기할 때 항상 등장하는 '미래세대'란 단어의 힘.
결국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 인간은 세상을 사랑할 수 없는 것 아닐까.
그게 가족이든, 연인이든, 자식이든, 친구든간에, 인간은 구체적인 사랑의 대상을 통해서, 그 관계를 통해서 존재를 긍정하고 세상을 긍정할 수 있다. 긍정한다는건 거대한 강의 흐름을 보는 것과 같아서, 그 안의 더러움을 똑바로 바라보면서도 그 전체의 흐름이 지닌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 따라서 자아에 갇히고 자신의 논리로만 세상을 분석,분류하는 이는 그 흐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오직 논리의 완성을 위한 비판만 있을 뿐이다.
때문에 이제 난 구체적인 대상이 빠진 인류애의 진정성을 믿지 않는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한다.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고 긍정하지 못하는 이는, 집착하고 비뚤어진 감정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 뿐이다. 대상을 오롯이 보지 못하고, 감정에 휘둘리며, 편안해지지 못한다. 편안하지 못한건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면 대상도 편안해질 수 없다. 대상에 대한 집착은 결국 자신에 대한 집착이다. 집착과 사랑의 가장 큰 차이는 자유로움에 있다. 자신에게 집착하는 이는 자신을 놓지 못하고 속박되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이는 그 사랑을 통해 자신을 놓고 자유로울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자유로운 이, 스스로 홀로 선 이만이 타인을, 세상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당연한 듯 생각해 왔으나, 어느순간 절절하게 느껴지는 깨달음.
나-너-세상이 사랑으로 관계하며 자유로울지니 그것이 아름다움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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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에리히 프롬 식의 결론. 소유와 결별한 사랑이, 달의 뒤편, 그 가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세상의 어둠에서는 허울좋은 자기 위안 정도로 치부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엔 물적 조건, 외적 조건, 성격 차, 기질 차, 기타 등등의 이유로 사랑하는 대상에게 사랑받을 수 없었던 수많은 이들이 있고, 때문에 자신조차 사랑할 수 없는 수 많은 이들이 있다. 또한 세상의 사랑 대부분은 집착과 애증과 멸시가 구분조차 되지 않게 얽혀버린 혼탁물 덩어리이며, 그 속에서 뒹굴어보지 않은 이는 속세의 사랑이 아닌 깊고 깊은 산 속의 사랑만을 이야기 할 수 있을 뿐인 것도 맞는 말이다.
때문에 존재론적 사랑은 때론 스스로의 감정에서 도망감을, 모두가 편하고 안전한 세계로 숨어버림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 절절하고 질퍽하고 더럽고 끈적하고 징한 애정의 강을 그 전체로 바라 볼 수 있을 때, 바로 그 곳은 집착을 벗어난 사랑이 있는 곳이기도 함을 믿는다.
결국 그건 자신만 아는 것. 항상 깨어있는 자만이 아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