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 산책

2005. 1. 12. 15:35 |
화요일이다.
그래서 불처럼 뜨거울 줄 알았는데, 구리구리한 구름이 사라질 생각을 않더니 저녁엔 비가 왔다. 아니, 왔다고 한다.

나는 그 시간에 영풍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들어설 때부터 냄새가 좋았다.
습기찬 날 새 책들이 내뿜는 꿉꿉한 종이 냄새가 팔랑팔랑 전해져왔다.
거진 몇 달만에 나는 팔자좋은 한량처럼 서점의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양반다리까지 꼬고는 몇 시간이고 책을 읽을 시간을 가졌다.

영풍에서 내가 그리는 자취는 언제나 비슷하다.
가장 먼저 새로나온 사진 서적이 있는지 확인하고, 그 다음엔 괜찮은 소설이 나왔는지 확인한 후 철학 및 인문 코너로 간다. 가끔 사회학이나 기타 코너에서 서성거리기도 한다.

얼마간 사진붐을 타고 사진책들이 쏟아져나오나 싶더니, 요즘은 좀 주춤한 기색이다. 그래도 데리다의 <시선의 권리>는 썩 괜찮았다. 한 마디의 설명 없이 수백장의 사진으로 데리다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한다. 시선에 대한 시선. 시선과 시선의 만남. 꼬임. 얽힘. 그 과정에서 부서지는 것들과 치유되는 것들. 사랑을 나누는 연인의 손 끝. 화장한 어린아이의 담배. 값이 좀 비싸 사진 못했지만 한 권쯤 사놓으면 두고 두고 볼 만한 책이었다. (사진이 모두 끝나고 나면 데리다의 '말'이 시작된다.)

최건수의 25인의 사진가 시리즈 2편인 <사진 속으로의 여행>도 많은 자극이 되었다. 특히 쿠델카를 닮은 성남훈의 다큐멘터리 사진은 다큐 사진에 조금은 물려있던 내게 신선함을 던져 주었다. 지금 성남훈은 이미지 프레스 등에서 반전 사진가로 열심히 활동 중이다. 일기 쓰고나면 성남훈 사진이나 찾아 봐야지. 이것도 사고팠지만, 두어 시간 동안 2/3이상 읽어버리고 나니 돈이 아까워서 못 샀다. 돈 주고 사는 것 중에 나는 '살 책' 고르기가 가장 힘들다.

소설은... 내가 안목이 없는건지 한국 소설이 망해가는건지 마땅치가 않았다. 겉만 번드러지게 양장본으로 포장해서 예전의 명작들을 팔아먹거나, 성과 관련된 선정적인 카피를 내세운 책들이 다수였다. 내용이 어떻든간에 카피가 저러면 내용도 비슷비슷할 것 같아 들춰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백년의 고독>과 <야만인을 기다리며>를 추천 받았으니, 도서관 가서 그 책들이나 빌려야겠단 생각에 소설 코너를 나섰다.

멍하니 몇 발작 걸었는데 옆으로 어린이 코너가 보인다.
그곳엔 영풍에서 제일 재미있는 장소가 있다.
바로 어린이 책 코너 가운데에 자리잡은 둥그렇고 길다란 의자다.
그곳엔 사르륵하고 조심스레 책장을 넘기는 조막만한 손들이 있다.
와르르 몰려있는 아이들의 제각각인 진지한 표정은 보고만 있어도 슬며시 웃음이 지어진다. 서점 산책의 또다른 즐거움 중 하나다.

그러고보니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들은 왜 이곳을 찾는 걸까.
공짜 데이트를 위해서?
책을 읽을 때의 가라앉는 마음으로 복잡한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
(몸짱이 되는 법을 알기 위해서나 승진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빼자.) 오늘 저녁에 할 요리를 위해서? 연애를 잘 하기 위해서?
혹시 당신은 구원을 바라는가?

나는 사람들을 본다.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크게 들으며 저들이 왜 이곳에 왔는지 생각한다. 그들이 점으로 보인다. 서점은 도시에서 사람을 점으로 존재하게 하는 몇 안되는 공간 중 하나다. 지하철 통로에서, 번화가에서 사람들은 선으로 존재하고, 지하철 안에서 버스 안에서 사람들은 덩어리로 존재한다. 그렇게 그들은 하나다. 흐르고 뭉치는 약간은 진득한 하나다. 하지만 서점에서 그들은 개별적인 점이다. 산만하고 분산되어 있고 주저앉아 있다. (바닥에 앉아 부끄럽지 않은 몇 안되는 곳이 서점이다.) 점 들 역시 서점에선 저마다 자신이 점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서점에서 점들을 본다. 무표정함 속에 감춰진 색깔을 읽으려 한다. 철학 코너의 당신은 보라다. 소설 코너의 당신은 파랑이다. 요리 코너의 당신은 노랑이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왜?
나는 수북히 책이 꽂혀있는 책장에 기대기 위해 서점을 찾는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기 위해 서점을 찾는다.
책은 말이 없어 소란스럽지 않으나,또한 말이 있어 나를 위로하고
도시는 공기가 좋지 않아 오래도록 꼿꼿이 서 있기엔 힘에 부치다.
그래서 나는 서점을 찾는다.

결국 오늘도 나는 책 한 권 사지 못했다.
Posted by nar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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