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무소유 -베짱이가 개미에게 / 여산
글 2006. 6. 28. 00:31 |*** 진정한 무소유의 삶을 위하여 생명체는 존재하는 순간부터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주위로부터 에너지를 섭취해야 하기에 주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존재를 이루고 있는 이러한 연기적으로 열린 관계는 결국 우리로 하여금 소유라는 형태를 통하여 자신의 유지를 안전하게 확보하고자 한다. 생명체가 지닌 이러한 자기 유지에의 끊임없는 욕망은 생존의지로서 당연한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은 그 소유에 대한 탐욕성과 맹목성에 있어서 매우 독특하다. 사자와 같은 육식동물은 배부르면 옆을 지나가는 사슴이 있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필요한 것을 소유하고도 만족하기 보다는 더욱 소유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경쟁하고 노력한다. 끊임없는 생산과 소유를 미덕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생태계를 파괴하고 팽창하면서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인간 문명도 인간이 지닌 이러한 모습의 또 다른 한 면일 뿐이다. 인간이 지닌 탐욕은 자본주의 속에서 정당화되면서 사람들은 소유를 위한 삶 속에서 자신들의 탐욕에 갇혀 평생 개미처럼 일하다가 사라져간다. 하지만 행복과 자유는 결코 물질이나 정신적으로나 소유함으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소유의 삶이 될 때 비로소 얻어진다고 많은 현인들은 소유에 대한 집착으로 스스로 허덕이는 이들에게 이야기해 왔다. 하지만 정신적, 물질적 무소유만으로 행복을 향한 무소유의 삶이 완성되어 가는 것일까. 그것 역시 결코 아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자신도 모르게 시간을 소유하는 것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태어나서 반드시 죽음으로 향해가는 있는 육신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있지도 않는 시간을 만들어 낸 후 그 시간을 소유하고자 함으로서 스스로가 만들어 낸 시간의 노예가 된다. 이것은 아마도 현대사회에서 시간을 소유함으로서 물질적, 정신적 소유도 더욱 가능하게 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론 역도 성립하겠지). 시간을 소유하며 사는 우리들의 삶은 과거, 현재, 미래로 표현되면서, 과거를 소유한 사람들은 그 삶의 무게로 현재를 힘들어 하며, 미래를 소유한 사람들은 희망의 무게로 현재를 힘들어 한다. 한편, 현재라는 시간을 소유한 사람들은 지금을 만끽하고 즐기기 위하여 삶을 소진하고 있다. 그렇다면 결국 시간의 무소유란 무엇인가. ‘지금 이 자리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사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이란 말도 성립하지 않는다). 지금이라는 시간에 대한 소유마저 비워버릴 때 과거, 현재, 미래가 따로 없는 - 동시에 진행되는- 지금 이순간이 있을 뿐이다. 이를 통해 지금 이 자리의 나라는 생명의 온존재가 찬란하게 현시(顯示)되게 된다. 따라서 종종 우리가 말하는 지금 현재를 위해 살라는 말도 여전히 시간을 소유하고 그 속에 갇혀 있는 잘못된 표현인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 산다는 것을 달리 말한다면, 장자 인간편에 나오는 '乘物以遊心'이라는 표현처럼 놀면서 (遊) 사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와 이를 통한 행복은 시간을 소유하지 않음으로서 완성된다. 허나 불행히도 인간만이 시간을 탐욕스럽게 소유하고자 한다. 특히 합리적 이성에 의한 시간의 소유로서 시작된 서양 근대 문명은 과학이라는 방법을 통해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시간을 더욱 많게 함과 동시에 자본주의의 이름으로 시간의 소유를 조장해왔다. 진정 대자유인이되고자 한다면 물질과 정신적인 소유 외에 시간을 소유하고자 하지 않아야 한다. 한편, 물질이나 정신적인 것뿐만 아니라 시간마저 비운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비운다는 것은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를 말하는 것이니, 진정한 자유란 무엇으로부터 벗어남으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상황 속에 있더라도 그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음을 말한다는 것을 상기하여야 한다. 주인(主人)은 이미 주인이기에 단지 쓸(用) 뿐이지 결코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 방법이란 결국 내 안에 있는 끈질기고도 무의식적인 시간에 대한 소유에의 열망을 들여다보아 단지 시간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무소유를 통해 누구나 평화로운 진정한 마음의 생태학을 이루게 될 것임을 확신한다. 근대사회 속에서 시간에 소유 당하지 않았던 좋은 예로서는 착취와 차별에 근거한 자본주의적 삶을 거부하고 자연의 삶을 살았던 스콧 니어링이 있을 것이다. 그는 하루 종일 일해서 생산을 늘려 부를 축적하기 보다는 대략 하루의 시간 배분을 4시간의 생계를 위한 시간, 4시간의 자기 자신의 지적 자유와 상상력을 위한 시간, 그리고 4시간을 뜻을 공유할 수있는 이들과의 교류와 나눔의 시간으로 설정하고 살았다. -여산 http://www.cyworld.com/zarit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