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한 청소기

일기 2005. 3. 30. 14:49 |
오후였다.
나는 햇살이 잘드는 대학원 도서관의 창가 자리에 앉아,
한적하게 생태학 저널을 뒤적이고 있었다. 사서 한 분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는 고요하고 따뜻한, 그래서 기분좋은 봄날의 독서였다. 책의 내용보단 분위기에 몰입하고 싶을 정도로, 책 위로 쏟아지는 곱게 산란된 빛과 사람없는 도서관의 공간감이 참 좋았다.

그런데 내 발을 녀석이 툭 치면서 부터 '원생의 여유로운 나날들'이란 잘 팔리지 않을 것 같은 감성멜로 영화가, 더 안팔릴 것 같은 70년대 SF 영화로 바뀌고 말았다.
그 녀석은 U.F.O처럼 생긴(sf영화답게) 청소기였다.
주변에 원형으로 걸레가 달려있고 가운데 볼이 있어 장애물에 부딪히면 자동으로 다른 곳으로 굴러가는 원리로 움직이는 듯 했다. 전체적으로 간결한 구조여서 위에 중절모를 씌우면 딱 맞을 것 같았는데, 제리(톰과 제리의 그 제리!)가 모자 안에서 마구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자꾸만 연상되어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아닌게 아니라 하도 발발거리며 돌아다녀서 '어이, 저기 청소해'하면 '네, 주인님' 하면서 쓱싹쓱싹 바닦을 닦을 것 같은 그런 청소기계였다.

사서 분에게 물어보니 용역을 쓰면 비싸고 하루에 한 번 밖에 안 닦기 때문에 종일 바닥을 닦는 녀석을 고용했다고 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진 않으나 어쩔 수 없다는 말투였다. 그러고보니 우연히 본 홈쇼핑에서 녀석을 본 것 같기도 했다.

나는 흥미롭게 녀석을 한참동안 관찰하다, 다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따땃한 봄날의 한적한 도서관에서 우리 셋은 그렇게 각자의 일에 충실했다.
Posted by nar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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