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설문 인터뷰 때문에 파주시에 다녀왔다. 출발시간 3분전에 서울역에 도착해서, 모유 먹던 힘까지 뽑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간신히 열차에 올라타고나니 심장이 아프고 입에서 단물이 나와 죽을 뻔 했다. 다행히 허무하게 죽지는 않은데다, 하늘은 맑고 구름 동동 떠다니고, 잠자리 날아댕기니 1200원 기차표가 비행기표 뺨치더라.
덕촌역에 내려서 한참 걸어갔는데, 서울을 조금만 벗어나도 느껴지는 소도시의 한적한 분위기에 취해서, 약속 시간에 늦었음에도 세월아 네월아 설렁설렁 걸어갔다. 4층을 넘어가는 건물이 드물고, 길은 넓은데 차와 사람은 없고, 날씨도 느긋한 것이 딱 이런 곳에 살고 싶더만. 아, 증말 2호선 녹색 테두리 안에서 살려면 어차피 돈도 없응께, 서울 근교에 직장 구해서 살면 좋겄다.
민들레씨는 날잡고 집단 짝짖기를 할 모냥인지 허벌나게 날리는 것이, 누구는 귀로 들가고 코로 들간다 카던데, 내 보기엔 그저 하얀 나비들이 하늘로 오르는 모습 같이 예쁘기만 하더라.
아, 이 짧은 여행이 즐거웠던 건 어제 반쯤 읽다가 오늘을 위해 아껴둔 소설<아내가 즐거웠다>가 무지하게 재밌었던 탓도 있다. 일처다부제라는(복수의 사랑도 아니고 복수의 결혼인), 어떤 영화도 파멸로 치닫지 않을 수 없었던 주제를 가지고 피하지도 않고 정면돌파하다니 작가의 용감함에 박수를. 게다가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에게 서서히 설득당하는(고놈의 사랑 때문에) 경로를 따라가다보면, 꼭 (일부일처제사회에 딱히 티나는 저항없이 살아가는)내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지도록 어찌 그리 실감나게 써놓았는지, 딱 잘팔리겠단 생각이 들더라.
책을 읽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헤라가 질투의 화신이니 뭐니 하면서 여자는 본질적으로 질투하는 존재인 것처럼 묘사하는 수많은 신화나 이야기 역시 가부장제하에서 비공식적 일부다처제(혹은 일부일처다애인제)가 허용되어 오던 사회의 산물 아닐까. 하는
수많은 가부장들의 여성편력에 대한 도덕적 방어기제 같은 용도로 쓰여지는 것 아닌지.
어쩌면 본질적으로 성적 소유욕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건, 오히려 남성 아닐까. 남성이야 말로 실은 homo-jealousious가 아닐까. 자기가 애인 만들고 단란주점 다니는건 괜찮지만 아내가 단 한 번이라도 바람피면 이혼서류에 도장 찍으라고 달려드는 수많은 남성들의 모습이 단순히 질투심 때문은 아니겠지만 말이지. 아, 모르겠다. 요즘은 반대상황에서 용서하고 이해하고 혹은 구걸하는 남자들도 많으니께(도쿄타워의 남자 캐릭터라든지) 질투는 사회문화적 산물이기도 하고 감정의 권력관계에서 나오는 거 같기도 하고 그렇구만.
암튼 젠장할 소유욕은 사상적으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감정적으로 어쩔 수 없기도 하거니와 소유욕을 자제하는 자유주의적 연애랄지 결혼이랄지가 그닥 멋져보이지도 않아서, 노력은 해도 틀 자체를 전복하기엔 그릇이 딸린다.
책에 나오길, 복수의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을 일컬어 폴리아모리스트(polyamorist)라 부르고 이들의 폴리아모리즘을 폴리피델리티라고 한댄다. 폴리피델리티란 가족 확대를 통해 친밀감을 강화하는 것이며 거기에 그치지 않고 집단 결혼과 공동 양육, 완전한 재산 공유, 그리고 공동체 생활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겠다는 사상이랜다. 성적으로 평등하고 소유역 없는 관계를 실현하며, 배우자 간의 친밀성과 진정한 사랑을 모두 아우른다고 하고, 컴퍼션(compersion)이라는 말이 있는데 성적 질투심과 반대되는 말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을 볼 때 생기는 따스한 감정을 뜻하고 이걸 추구한대네.
근디 이렇게 실천하고 사는 공동체에서도 이러한 사상으로 결합한 가족이 5년이상 지속될 확률은 7%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럼 일부일처제로 5년이상 한 눈 팔지 않고 이 사람만 변함없이 좋은 결혼생활의 확률은 얼마나 될까? 이혼률 30%는 지난해 이혼수/결혼수로 계산한거라 틀린거라고 하고, 이혼하지 않아도 이미 이해하고 포기하고 사는 부부들도 많으니 마냥 좋은(결혼할때의 마음만큼 혹은 그 이상 좋은) 부부는 뭐 어림잡아 5%쯤 될라나? 것도 안될라나. -_-
확률이 얼추 비슷하다면, 그리고 내가 고도의 정신적 수준에 도달하진 못한다는 가정 하에서는, '우린 각자가 복수의 사랑을 할 수 있는 가능성뿐 아니라 그것의 실현까지도 인정하고 이해하는거얌~'이라고 계약하는 관계와 '니 딴 놈 보면 죽는디. 그래 보는 것까진 참아주마. 딴 놈과 자면 우린 끝. 우리 둘만 좋아라 하는거다'라고 계약하는(결혼같은) 관계, 두 놈을 놓고 각각에서 얻고 잃는 것들의 수지타산 계산서를 촤라락 뽑아본다면 어떻게 나올라나.
내 보기엔 복수의 사랑을 인정하는 연애 결혼이나, 한사람만 좋아하는 연애 결혼이나, 전자는 소유욕을 극복해야 되고, 후자는 성욕을 극복해야 하니께 둘 다 본능하고 그리 딱 맞아떨어지는 관계는 아닌 것 같다. 후자가 사회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강요되는 측면이 있으니까 공평한 게임은 아니지만. 양자 모두 사랑의 본질을 실현하는 어느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노력하고 이해하고 항상 깨어있어야 하니까,속세에선 이를 '위대한 사랑'이라 부를만한 거제.
하오면 사회학적으로야 현 사회에 가장 적합한 연애결혼양식에 대해 좔잘 규정하고 설명할 수 있겠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선 옳고 그름은 없고 취향과 지향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68 혁명식의 성해방론에서 여전히 사회는 자유롭지 못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또 진부하다면 진부한거니까. 그런고로 앞서 말한 손익계산서는 누가 계산기를 두드리냐에 따라 다 다르게 나오겄지 뭐.
덕촌역에 내려서 한참 걸어갔는데, 서울을 조금만 벗어나도 느껴지는 소도시의 한적한 분위기에 취해서, 약속 시간에 늦었음에도 세월아 네월아 설렁설렁 걸어갔다. 4층을 넘어가는 건물이 드물고, 길은 넓은데 차와 사람은 없고, 날씨도 느긋한 것이 딱 이런 곳에 살고 싶더만. 아, 증말 2호선 녹색 테두리 안에서 살려면 어차피 돈도 없응께, 서울 근교에 직장 구해서 살면 좋겄다.
민들레씨는 날잡고 집단 짝짖기를 할 모냥인지 허벌나게 날리는 것이, 누구는 귀로 들가고 코로 들간다 카던데, 내 보기엔 그저 하얀 나비들이 하늘로 오르는 모습 같이 예쁘기만 하더라.
아, 이 짧은 여행이 즐거웠던 건 어제 반쯤 읽다가 오늘을 위해 아껴둔 소설<아내가 즐거웠다>가 무지하게 재밌었던 탓도 있다. 일처다부제라는(복수의 사랑도 아니고 복수의 결혼인), 어떤 영화도 파멸로 치닫지 않을 수 없었던 주제를 가지고 피하지도 않고 정면돌파하다니 작가의 용감함에 박수를. 게다가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에게 서서히 설득당하는(고놈의 사랑 때문에) 경로를 따라가다보면, 꼭 (일부일처제사회에 딱히 티나는 저항없이 살아가는)내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지도록 어찌 그리 실감나게 써놓았는지, 딱 잘팔리겠단 생각이 들더라.
책을 읽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헤라가 질투의 화신이니 뭐니 하면서 여자는 본질적으로 질투하는 존재인 것처럼 묘사하는 수많은 신화나 이야기 역시 가부장제하에서 비공식적 일부다처제(혹은 일부일처다애인제)가 허용되어 오던 사회의 산물 아닐까. 하는
수많은 가부장들의 여성편력에 대한 도덕적 방어기제 같은 용도로 쓰여지는 것 아닌지.
어쩌면 본질적으로 성적 소유욕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건, 오히려 남성 아닐까. 남성이야 말로 실은 homo-jealousious가 아닐까. 자기가 애인 만들고 단란주점 다니는건 괜찮지만 아내가 단 한 번이라도 바람피면 이혼서류에 도장 찍으라고 달려드는 수많은 남성들의 모습이 단순히 질투심 때문은 아니겠지만 말이지. 아, 모르겠다. 요즘은 반대상황에서 용서하고 이해하고 혹은 구걸하는 남자들도 많으니께(도쿄타워의 남자 캐릭터라든지) 질투는 사회문화적 산물이기도 하고 감정의 권력관계에서 나오는 거 같기도 하고 그렇구만.
암튼 젠장할 소유욕은 사상적으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감정적으로 어쩔 수 없기도 하거니와 소유욕을 자제하는 자유주의적 연애랄지 결혼이랄지가 그닥 멋져보이지도 않아서, 노력은 해도 틀 자체를 전복하기엔 그릇이 딸린다.
책에 나오길, 복수의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을 일컬어 폴리아모리스트(polyamorist)라 부르고 이들의 폴리아모리즘을 폴리피델리티라고 한댄다. 폴리피델리티란 가족 확대를 통해 친밀감을 강화하는 것이며 거기에 그치지 않고 집단 결혼과 공동 양육, 완전한 재산 공유, 그리고 공동체 생활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겠다는 사상이랜다. 성적으로 평등하고 소유역 없는 관계를 실현하며, 배우자 간의 친밀성과 진정한 사랑을 모두 아우른다고 하고, 컴퍼션(compersion)이라는 말이 있는데 성적 질투심과 반대되는 말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을 볼 때 생기는 따스한 감정을 뜻하고 이걸 추구한대네.
근디 이렇게 실천하고 사는 공동체에서도 이러한 사상으로 결합한 가족이 5년이상 지속될 확률은 7%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럼 일부일처제로 5년이상 한 눈 팔지 않고 이 사람만 변함없이 좋은 결혼생활의 확률은 얼마나 될까? 이혼률 30%는 지난해 이혼수/결혼수로 계산한거라 틀린거라고 하고, 이혼하지 않아도 이미 이해하고 포기하고 사는 부부들도 많으니 마냥 좋은(결혼할때의 마음만큼 혹은 그 이상 좋은) 부부는 뭐 어림잡아 5%쯤 될라나? 것도 안될라나. -_-
확률이 얼추 비슷하다면, 그리고 내가 고도의 정신적 수준에 도달하진 못한다는 가정 하에서는, '우린 각자가 복수의 사랑을 할 수 있는 가능성뿐 아니라 그것의 실현까지도 인정하고 이해하는거얌~'이라고 계약하는 관계와 '니 딴 놈 보면 죽는디. 그래 보는 것까진 참아주마. 딴 놈과 자면 우린 끝. 우리 둘만 좋아라 하는거다'라고 계약하는(결혼같은) 관계, 두 놈을 놓고 각각에서 얻고 잃는 것들의 수지타산 계산서를 촤라락 뽑아본다면 어떻게 나올라나.
내 보기엔 복수의 사랑을 인정하는 연애 결혼이나, 한사람만 좋아하는 연애 결혼이나, 전자는 소유욕을 극복해야 되고, 후자는 성욕을 극복해야 하니께 둘 다 본능하고 그리 딱 맞아떨어지는 관계는 아닌 것 같다. 후자가 사회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강요되는 측면이 있으니까 공평한 게임은 아니지만. 양자 모두 사랑의 본질을 실현하는 어느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노력하고 이해하고 항상 깨어있어야 하니까,속세에선 이를 '위대한 사랑'이라 부를만한 거제.
하오면 사회학적으로야 현 사회에 가장 적합한 연애결혼양식에 대해 좔잘 규정하고 설명할 수 있겠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선 옳고 그름은 없고 취향과 지향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68 혁명식의 성해방론에서 여전히 사회는 자유롭지 못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또 진부하다면 진부한거니까. 그런고로 앞서 말한 손익계산서는 누가 계산기를 두드리냐에 따라 다 다르게 나오겄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