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들어 진로에 대해 다시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내가 가장 '땡기는' 것이 무엇인지가 나의 일상의 화두가 되었다.
적당하고 안정된 수입, 부모님 및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사회적 인정, 정치적 올바름의 여부 등등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요인을 다 고려해보았지만 결론은 의외로 간단했다.
앎의 기쁨.
청소년기부터 서울대가 야기하는 학벌주의의 병폐에 대해 누누히 들어오면서도, 동경을 차마 버릴 수 없었던 이유가 서울대 배지에 찬란하게 새겨진 그 한마디 'VERITAS LUX MEA' 때문이 아니었던가. 뭐, 물론 현대철학과 과학사를 공부하면서 진리라는 단어가 지닌 기독교적 오만함과 허구성에 소시적의 동경은 한 풀 꺽이긴 했지만, 진리의 절대성이 사라졌다고 앎의 기쁨이 사라진건 아니니까. 오히려 절대적이고 완전한 진리에 대한 서구적 집착에서 벗어나면서 기쁨의 폭은 더 커졌다. 새로운 인식, 새로운 세계관에 접근할때의 그 긴장감과 흥분. 짜릿함. 그 무엇에 비할쏘냐.
고미숙이 써낸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를 읽으며 가장 공감했던 부분도 그거였다.
지금 대학으로 대표되는 학계가 지닌 가장 고질적인 문제점은 지식이 앎의 기쁨으로 부터 소외되는데 있다는 말.
공학과 자연과학은 물론이고 인문,사회과학까지 자본주의에 영토화되고, 끊임없는 전문화만이 생존권을 보장받게 된 학계.
열정어린 연구보다 프로젝트 따오기와 지난한 회의만이 반복되는 교수사회.
굳이 사회적인 부분까지 언급할 필요도 없다. 내가 공학을 뒤로하고 뛰쳐나온 점이 실은 거기에 있었으니까.
기쁨이 없는 지식. 나로부터 소외된 지식.
소외된 지식, 지식으로부터의 소외는 내가 보기엔 두가지를 결핍하고 있다.
첫째는 상상력.
상상력의 결핍은 지식의 목적성이 외부에서 주어졌을때 확연히 드러난다. 즉, 지식이 외부적인 정당성을 획득하기위한 하나의 도구로 사용되고 연구될 때.. 가령 이익률과 효율성을 극대화해야하는 공학 연구,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가장 극도화 시켜야 하는 사회공학연구(혹은 운동공학), 환경적인 피해를 최소화한 환경관리 방안까지도, 그 목적성이 외부로부터 주어졌을때 상상력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이런 연구에서 바랄 수 있는 것은, 혹은 바라는 것은 성취감과 인정욕, 사회적 영향력, 그리고 많은 경우 물질적 보상이다. 만분의 일 확률로 창조적인 생각을 한다해도 각박한 시간배분과 효율성의 압박에 저 밑으로 묻혀버리기 쉽상이다. 하지만 상상력이 결핍된 연구는 아무리 정확하고 효율적이고 멋드러질지라도 앎 자체에서 오는 기쁨은 누릴 수 없다. 그리고 점점 일부에서 가속화되고 있는(현대 철학과 과학의 통합적인 흐름에 역행해서) 전문화는 상상력이 끼어들 여지를 줄이고 있다. 최근에 쓰이고 있는 기술들, 이론들을 따라가기 바쁘니까 차근히 기저에 깔려있는 것들을 이해하고 새롭게 상상해보기보단 도구적으로 쓱 가져다 쓰기 쉽상이다. 학부전공에서 커리큘럽을 소화해서 내 나름의 상상력으로 비틀어서 답을 쓴 건 물리화학시간에 단 한 번이었다. 그것도 처음엔 틀렸다고 답안지가 매겨져서 나온 것을 항의해서 겨우 맞게 되었던 것 같다. 애초부터 '정답'이라는게 존재하는 자연과학과 공학의 시험이란 제도 자체가 상상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에 다름 아니니까.
두번째는 방향성.
방향성이란 말은 지식의 방향이 나를 향해 있어야 한단 이야기다. 그것이 고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든, 사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든 새로운 지식은 나를 새롭게 설명할 수 있어야 짜릿함이 있다. 푸코의 박사논문 '광기의 역사'를 보며 정말로 감탄한 것은 그것이 매서운 스웨덴의 추위 속에서 질릴만큼 방대한 옛문헌들을 꼼꼼하게 뒤져가며 기존의 획일적인 역사해석에 주름을 만들었다는 점이 아니었다. 바로 그 방대한 논문이 결국은 자신의 광기를 설명하기 위함이었다는 점, 세상사람들이 미쳤다고 말하는 것이 사실은 미친것이 아니다라는 항변이었다는 점, 세상사람들이라는 보편적 주체를 설정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며 폭력이라는 사실을 계보학적으로 밝혀냈다는 점이었다. 니체와 들뢰즈를 좋아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두 사람의 원서를 그리 많이 읽어보진 않았지만, 조금만 읽어봐도 느낄 수 있는 것은 이런 사유를 하고 이런 글을 쓰며 저자가 느꼈을 짜릿함, 디오니소스적인 기쁨이었다. 카오스모스처럼 헝클어져있는 수많은 사유속에서 이런 것들을 끄집어 올리면서 그리고 그로인해 자신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을때 저자가 느꼈을 희열의 정도를 나는 짐작조차 하기 힘들다. '나'라는 하나의 주체가 존재하냐 마냐의 문제를 떠나서 세상과 나의 관계를 설명하고, '나'라는 하나의 사건과 다른 사건들과의 연결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소외되지 않은 지식일 것이다.
이러한 소외되지 않은 지식, 기쁨의 지식에서 다른 모든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다. 사회적 파급력, 정치적 영향력, 돈이 되는 지식인지 아닌지 등은 기쁨 이후의 문제이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 이상적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상적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 사람 중 대부분은 자신이 놓쳐버린 꿈에 대한 회의를 짊어지고 살면서, 다른 사람 모두가 결국은 자신과 같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렇게 말한다. 이미 기쁨의 지식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는 삶이 가능하기 위한 사회적 여건은 마련되었다고 본다. 막말로 어떻게하든 굶어죽지는 않을정도의 생산력 향상은 이루어진거고, 더불어 정보의 유통경로가 기존 대학의 수직적이고 폐쇄적인 정보의 흐름에서 수평수직을 논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의 네트워크적인 지식 흐름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실례가 있지 않은가. 수유+너머 라는 인텔리겐차 공동체도 있는거고, 바람과 물 연구소도 있는거고, 이정우씨의 철학아카데미도 있는거고. 모두가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도 않고 어려움도 많지만, 앎의 기쁨. 그 짜릿함을 누리고 있다.
(그래도 이상적이라 생각되는 분은 아까도 언급한 고미숙씨의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를 보라. 만원 밖에 안한다.)
어쩌면 이런 비판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배웠으니까 가능한거라고. 맞다. 세상엔 돈없어서 배울 기회도 갖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근데 그래서 뭐. 계급의 문제는 아직도 매우 중요한 문제임에 틀림없지만, 더이상 그것이 본질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긴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별로 없는 것 같다) 작금의 세상은 다양한 모순들로 가득차있고 앎의 기쁨은 그러한 모순들의 벡터와는 상극에 있다. 수유+너머 식의 지식 공동체의 활동은 자본주의로부터 탈주하고, 동서고금의 역사를 횡단하며 끊임없이 탈영토화환다. 그것은 하나의 혁명이다. 그리고 거기엔 어떤 의무감도 부채의식도 사회적 대의도 없다. 단지 기쁨만이 있을 뿐!
물론 일년에도 열권이 넘는 책을 뽑아내는 '생성'이 따라줘야하겠지만. 기쁨과 생성은 함께 가는거니까.
어찌보면 간단하다. 몇가지 '부차적'인 것들을 포기하면 된다. 초등학교 수준(넉넉하게 중학교 수준?)의 산수만 할 수 있음 누구나 답을 낼 수 있다. 강남에 위치한 30평 이상의 아파트와 좋은 차와 화목한 가족, 그리고 주위로부터의 인정, 안정된 노후를 위한 자금 등 드라마와 광고들이 야기한 이미지들로부터 자유로우면 된다. 니체말마따나(혹은 고병권 말마따나) 가치의 가치를 되물어보면 된다. 지금 당신이 소중히 여기는 그 가치가 정말 가치있는가. 그래. 머리로는 동감해도 차마 버리지 못하는 불안감 그거. 버리면 된다(고 고미숙씨도 말씀하시더만) 왜. 수지가 안 맞으니까. 그런 이미지들에 나를 끼워맞추기 위해 드는 기회비용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하기싫은 공부 해야하고(재밌다고 세뇌시켜가면서), 교수될라고 눈치보고 한 번 자리라도 잡으면 온갖불의와 악행에도 꾿꾿하게 버텨야하고(직장은 더하지), 애도 잘 낳아야하지, 친구들 만나서 꿀리지 않아야하지, 뭐 나열하자면 뻔하고 끝이 없지 않을까. 내가가는 길이 길이라고 정말 '땡기는' 대로 살면 길은 거기에 나타나리라 믿으면 되지 않을까. (이럴땐 정말 긍정을 가르쳐준 니체가 고맙다) 적당히 자본주의 사회에 잘 적응해 사는 친구들을 만나도 전혀 꿀릴게 없음 잘 만나고 다님 되는거고, 만나서 스트레스 받으면 안 만나면 되는거고. 부모님께 물질적으로 못해드려 죄송하면 마음으로 다하면 되는거고, 같은 생각 가진 사람들 여럿있음 육아,교육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이 있는거고 등등. 여기까진 이미 다 나와있는 거니 상상력을 발휘하면 더 튀어나오겄지.
이런 이야기의 끝은 항상 도덕 교과서구만. 아니, 도덕은 아니지. 도덕은 선/악이 전제되어있고 어겼을 때의 죄의식이 전제되어있으니까. 도덕엔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오직 체제가 있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훈육과 주입이 있을 뿐.
이 글은 좋음과 나쁨, 기쁨과 슬픔에 관한 윤리적인 글이다. 때문에 이 글은 나에 대한 이야기다. 나의 가치와 그 가치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글을 통한 확인, 그런거.
그러니 이 글은 어느 시 제목처럼 십년 뒤의 나에 대한 편지 정도로 해두자고.
지금 나는 이러한데 10년뒤의 나는 지금의 나에게 과연 당당할까나.
-20040528
적당하고 안정된 수입, 부모님 및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사회적 인정, 정치적 올바름의 여부 등등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요인을 다 고려해보았지만 결론은 의외로 간단했다.
앎의 기쁨.
청소년기부터 서울대가 야기하는 학벌주의의 병폐에 대해 누누히 들어오면서도, 동경을 차마 버릴 수 없었던 이유가 서울대 배지에 찬란하게 새겨진 그 한마디 'VERITAS LUX MEA' 때문이 아니었던가. 뭐, 물론 현대철학과 과학사를 공부하면서 진리라는 단어가 지닌 기독교적 오만함과 허구성에 소시적의 동경은 한 풀 꺽이긴 했지만, 진리의 절대성이 사라졌다고 앎의 기쁨이 사라진건 아니니까. 오히려 절대적이고 완전한 진리에 대한 서구적 집착에서 벗어나면서 기쁨의 폭은 더 커졌다. 새로운 인식, 새로운 세계관에 접근할때의 그 긴장감과 흥분. 짜릿함. 그 무엇에 비할쏘냐.
고미숙이 써낸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를 읽으며 가장 공감했던 부분도 그거였다.
지금 대학으로 대표되는 학계가 지닌 가장 고질적인 문제점은 지식이 앎의 기쁨으로 부터 소외되는데 있다는 말.
공학과 자연과학은 물론이고 인문,사회과학까지 자본주의에 영토화되고, 끊임없는 전문화만이 생존권을 보장받게 된 학계.
열정어린 연구보다 프로젝트 따오기와 지난한 회의만이 반복되는 교수사회.
굳이 사회적인 부분까지 언급할 필요도 없다. 내가 공학을 뒤로하고 뛰쳐나온 점이 실은 거기에 있었으니까.
기쁨이 없는 지식. 나로부터 소외된 지식.
소외된 지식, 지식으로부터의 소외는 내가 보기엔 두가지를 결핍하고 있다.
첫째는 상상력.
상상력의 결핍은 지식의 목적성이 외부에서 주어졌을때 확연히 드러난다. 즉, 지식이 외부적인 정당성을 획득하기위한 하나의 도구로 사용되고 연구될 때.. 가령 이익률과 효율성을 극대화해야하는 공학 연구,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가장 극도화 시켜야 하는 사회공학연구(혹은 운동공학), 환경적인 피해를 최소화한 환경관리 방안까지도, 그 목적성이 외부로부터 주어졌을때 상상력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이런 연구에서 바랄 수 있는 것은, 혹은 바라는 것은 성취감과 인정욕, 사회적 영향력, 그리고 많은 경우 물질적 보상이다. 만분의 일 확률로 창조적인 생각을 한다해도 각박한 시간배분과 효율성의 압박에 저 밑으로 묻혀버리기 쉽상이다. 하지만 상상력이 결핍된 연구는 아무리 정확하고 효율적이고 멋드러질지라도 앎 자체에서 오는 기쁨은 누릴 수 없다. 그리고 점점 일부에서 가속화되고 있는(현대 철학과 과학의 통합적인 흐름에 역행해서) 전문화는 상상력이 끼어들 여지를 줄이고 있다. 최근에 쓰이고 있는 기술들, 이론들을 따라가기 바쁘니까 차근히 기저에 깔려있는 것들을 이해하고 새롭게 상상해보기보단 도구적으로 쓱 가져다 쓰기 쉽상이다. 학부전공에서 커리큘럽을 소화해서 내 나름의 상상력으로 비틀어서 답을 쓴 건 물리화학시간에 단 한 번이었다. 그것도 처음엔 틀렸다고 답안지가 매겨져서 나온 것을 항의해서 겨우 맞게 되었던 것 같다. 애초부터 '정답'이라는게 존재하는 자연과학과 공학의 시험이란 제도 자체가 상상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에 다름 아니니까.
두번째는 방향성.
방향성이란 말은 지식의 방향이 나를 향해 있어야 한단 이야기다. 그것이 고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든, 사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든 새로운 지식은 나를 새롭게 설명할 수 있어야 짜릿함이 있다. 푸코의 박사논문 '광기의 역사'를 보며 정말로 감탄한 것은 그것이 매서운 스웨덴의 추위 속에서 질릴만큼 방대한 옛문헌들을 꼼꼼하게 뒤져가며 기존의 획일적인 역사해석에 주름을 만들었다는 점이 아니었다. 바로 그 방대한 논문이 결국은 자신의 광기를 설명하기 위함이었다는 점, 세상사람들이 미쳤다고 말하는 것이 사실은 미친것이 아니다라는 항변이었다는 점, 세상사람들이라는 보편적 주체를 설정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며 폭력이라는 사실을 계보학적으로 밝혀냈다는 점이었다. 니체와 들뢰즈를 좋아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두 사람의 원서를 그리 많이 읽어보진 않았지만, 조금만 읽어봐도 느낄 수 있는 것은 이런 사유를 하고 이런 글을 쓰며 저자가 느꼈을 짜릿함, 디오니소스적인 기쁨이었다. 카오스모스처럼 헝클어져있는 수많은 사유속에서 이런 것들을 끄집어 올리면서 그리고 그로인해 자신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을때 저자가 느꼈을 희열의 정도를 나는 짐작조차 하기 힘들다. '나'라는 하나의 주체가 존재하냐 마냐의 문제를 떠나서 세상과 나의 관계를 설명하고, '나'라는 하나의 사건과 다른 사건들과의 연결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소외되지 않은 지식일 것이다.
이러한 소외되지 않은 지식, 기쁨의 지식에서 다른 모든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다. 사회적 파급력, 정치적 영향력, 돈이 되는 지식인지 아닌지 등은 기쁨 이후의 문제이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 이상적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상적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 사람 중 대부분은 자신이 놓쳐버린 꿈에 대한 회의를 짊어지고 살면서, 다른 사람 모두가 결국은 자신과 같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렇게 말한다. 이미 기쁨의 지식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는 삶이 가능하기 위한 사회적 여건은 마련되었다고 본다. 막말로 어떻게하든 굶어죽지는 않을정도의 생산력 향상은 이루어진거고, 더불어 정보의 유통경로가 기존 대학의 수직적이고 폐쇄적인 정보의 흐름에서 수평수직을 논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의 네트워크적인 지식 흐름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실례가 있지 않은가. 수유+너머 라는 인텔리겐차 공동체도 있는거고, 바람과 물 연구소도 있는거고, 이정우씨의 철학아카데미도 있는거고. 모두가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도 않고 어려움도 많지만, 앎의 기쁨. 그 짜릿함을 누리고 있다.
(그래도 이상적이라 생각되는 분은 아까도 언급한 고미숙씨의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를 보라. 만원 밖에 안한다.)
어쩌면 이런 비판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배웠으니까 가능한거라고. 맞다. 세상엔 돈없어서 배울 기회도 갖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근데 그래서 뭐. 계급의 문제는 아직도 매우 중요한 문제임에 틀림없지만, 더이상 그것이 본질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긴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별로 없는 것 같다) 작금의 세상은 다양한 모순들로 가득차있고 앎의 기쁨은 그러한 모순들의 벡터와는 상극에 있다. 수유+너머 식의 지식 공동체의 활동은 자본주의로부터 탈주하고, 동서고금의 역사를 횡단하며 끊임없이 탈영토화환다. 그것은 하나의 혁명이다. 그리고 거기엔 어떤 의무감도 부채의식도 사회적 대의도 없다. 단지 기쁨만이 있을 뿐!
물론 일년에도 열권이 넘는 책을 뽑아내는 '생성'이 따라줘야하겠지만. 기쁨과 생성은 함께 가는거니까.
어찌보면 간단하다. 몇가지 '부차적'인 것들을 포기하면 된다. 초등학교 수준(넉넉하게 중학교 수준?)의 산수만 할 수 있음 누구나 답을 낼 수 있다. 강남에 위치한 30평 이상의 아파트와 좋은 차와 화목한 가족, 그리고 주위로부터의 인정, 안정된 노후를 위한 자금 등 드라마와 광고들이 야기한 이미지들로부터 자유로우면 된다. 니체말마따나(혹은 고병권 말마따나) 가치의 가치를 되물어보면 된다. 지금 당신이 소중히 여기는 그 가치가 정말 가치있는가. 그래. 머리로는 동감해도 차마 버리지 못하는 불안감 그거. 버리면 된다(고 고미숙씨도 말씀하시더만) 왜. 수지가 안 맞으니까. 그런 이미지들에 나를 끼워맞추기 위해 드는 기회비용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하기싫은 공부 해야하고(재밌다고 세뇌시켜가면서), 교수될라고 눈치보고 한 번 자리라도 잡으면 온갖불의와 악행에도 꾿꾿하게 버텨야하고(직장은 더하지), 애도 잘 낳아야하지, 친구들 만나서 꿀리지 않아야하지, 뭐 나열하자면 뻔하고 끝이 없지 않을까. 내가가는 길이 길이라고 정말 '땡기는' 대로 살면 길은 거기에 나타나리라 믿으면 되지 않을까. (이럴땐 정말 긍정을 가르쳐준 니체가 고맙다) 적당히 자본주의 사회에 잘 적응해 사는 친구들을 만나도 전혀 꿀릴게 없음 잘 만나고 다님 되는거고, 만나서 스트레스 받으면 안 만나면 되는거고. 부모님께 물질적으로 못해드려 죄송하면 마음으로 다하면 되는거고, 같은 생각 가진 사람들 여럿있음 육아,교육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이 있는거고 등등. 여기까진 이미 다 나와있는 거니 상상력을 발휘하면 더 튀어나오겄지.
이런 이야기의 끝은 항상 도덕 교과서구만. 아니, 도덕은 아니지. 도덕은 선/악이 전제되어있고 어겼을 때의 죄의식이 전제되어있으니까. 도덕엔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오직 체제가 있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훈육과 주입이 있을 뿐.
이 글은 좋음과 나쁨, 기쁨과 슬픔에 관한 윤리적인 글이다. 때문에 이 글은 나에 대한 이야기다. 나의 가치와 그 가치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글을 통한 확인, 그런거.
그러니 이 글은 어느 시 제목처럼 십년 뒤의 나에 대한 편지 정도로 해두자고.
지금 나는 이러한데 10년뒤의 나는 지금의 나에게 과연 당당할까나.
-2004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