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알랭 드 보통
글 2006. 6. 28. 00:40 |제 14장 "나"의 확인 12. "나"의 확인이란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존재에 정통성을 부여해 주기를 요구하는 것인데, 그러다보면 정확한 정체성을 가지는 일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좌우될 위험이 생긴다. 만일 스탕달의 말대로 다른 사람들 없이는 성격도 있을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침대를 함께 쓰는 사람은 능숙하게 거울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아니면 우리는 왜곡되고 말 테니까.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 감정이입의 결핍으로 인해서 우리 자신의 어떤 측면을 부인하는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될까? 이보다 더 근본적인 의심이 생길 수도 있다. 어차피 다른 사람이라고 할 때에는 그 말 속에(거울 표면이 절대 고르지 않을 것이므로) 그들이 우리를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왜곡한다는 전제가 깔린 것이 아닐까? 13.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 자신에 대한 느낌은 달라진다. 우리는 조금씩 남들이 우리라고 생각하는 존재가 되어가기 때문이다. 자아는 아메바에 비유할 수 있다. 아메바의 외벽은 탄력이 있어서 환경에 적응한다. 그렇다고 아메바에게 크기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자기 규정적인 형태가 없을 뿐이다. 부조리한 사람은 나에게서 나의 부조리한 측면을 끌어낼 것이다. 그러나 진지한 사람은 나의 진지한 측면을 끌어낼 것이다. 누가 내가 수줍어한다고 생각하면, 나는 아마 결국 수줍어하게 될 것이다. 누가 나를 재미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계속 농담을 할 가능성이 높다. 이 과정은 순환적이다. 제 24장 사랑의 교훈 6. 복잡한 문제들을 파고들다보면 가끔 도달하게 되는 순진한 상식으로 나는 가끔 묻곤 했다(마치 답을 봉투의 뒷면 정도에 다 적을 수 있는 것처럼). "왜 우리는 그냥 서로 사랑할 수 없는 것일까?" 사방에서 사랑으로 고민하는 것을 보면서, 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 친구, 낮 방송 드라마 스타, 미용사의 불평을 들으면서, 나는 모든 사람이 거의 똑같은 고통 때문에 힘들어하고 괴로워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공통의 해답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기도 했다. 공산주의자들이 국제 자본의 불평등 문제에 답을 제시하는 것과 같은 웅대한 규모로 세상의 로맨스 문제들에 대해서 형이상학적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 7. 나만 이런 유토피아적인 백일몽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자리에 있었는데, 그들을 낭만적 실증주의자들이라고 부르겠다. 그들은 충분한 생각과 치료법만 있으면, 사랑이 덜 고통스러운, 오히려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경험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 분석가, 설교자, 구루(원래 힌두교의 스승을 가리키는말/역주), 치료사, 작가들은 사랑이 문제로 가득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진정한 문제에는 진정한 해결책이 틀림없이 있다고 생각했다. 낭만적 실증주의자들은 감정 생활이 비참한 사람과 마주하면 우선 원인- 자존심 컴플렉스, 아버지 컴플렉스, 어머니 컴플렉스, 컴플렉스 컴플렉스- 을 파악하려고 하고, 그런 다음에 치유책(퇴행 치료, <신국> 독서, 원예, 명상)을 내놓는다. 융 학파의 훌륭한 분석가가 있었다면 햄릿의 운명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셀로도 치료실의 소파 위에서 자신의 호전성을 해소할 수 있었을 것이다. 로미오도 중매 회사를 통해서 좀 더 적합한 짝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오이디푸스도 가족 치료를 통해서 문제를 공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14. 대책에 서지 않는 사랑의 고통 때문에 비관적이 된 나는 사랑으로부터 완전히 떠나버리기로 결심했다. 낭만적 실증주의가 도움이 될 수 없다면, 유일하게 유효한 지혜는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말라는 금욕주의적 충고였다. 나는 이제 상징적인 수도원으로 물러나, 간소한 서재에 처박혀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소박하게 살아갈 생각이었다. .. 중략.. 16. 레이첼의 모습은 나에게 금욕주의적 접근방법의 한계를 일깨워주었다. 사랑에 고통이 없을 수 없고, 사랑이 지혜롭지 못한 것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잊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랑은 비합리적인 만큼이나 불가피했다. 그 불합리성이 사랑을 반박하는 무기는 되지 못했다. ... 중략... 금욕주의의 핵심에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실망시킬 기회를 주기 전에 스스로 실망해버리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금욕주의는 다른 사람과의 애정에서 생기는 위험, 사막에서의 삶보다 더 큰 인내심이 있어야 직면할 수 있는 위험에 대항하는 서툰 방어였다. 금욕주의는 감정적 혼란으로부터 자유로운 수도사적 존재를 요구한다고 하면서, 고통스러울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근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적 요구들의 정당성을 부정하려고 할 뿐이었다. 금욕주의자가 아무리 용감하다 할지라도 최고의 현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지점, 즉 사랑의 순간에는 결국 겁쟁이에 불과했다. 17. 문제를 가장 낮은 수준의 공통분모로 환원하는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문제의 복잡성에 눈을 감아버릴 수는 있다. 낭만적 실증주의와 금욕주의는 둘 다 사랑의 고민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한 부적절한 해답이다. 둘 다 모순들을 부둥켜안고 애를 쓰기보다는 문제를 단순화시켰기 때문이다. 금욕주의자들은 사랑을 고통과 비합리성으로 단순화시켜서 그것으로 사랑에 대항하는 결정적인 논증을 만들어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욕망을 좇다보면 틀림없이 받게 되는 상처를 피해갔다고 하지만, 감정적 요구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반면 낭만적 실증주의자들은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심리적 지혜로 문제를 단순화시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조금 더 사랑할 수 있게 되면 모두 고통 없는 사랑을 누릴 수 있다는 믿음을 만들어냈다. 그럼으로써 지혜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켰다고 하지만, 그 지혜의 교훈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여려운 일이라는 점을 무시해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