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체계론 논평
유목민의 의리: 의리에서 신뢰로
환경관리 차영래
유행하는 Nomadism
최근들어 유목민(Nomad) 또는 유목주의(Nomadism)라는 개념이 하나의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 정치, 사회, 문화, 예술, 패션, 광고 등 유목이란 단어가 안 쓰이는 분야를 찾기 힘들 정도로 분야를 불문하고 널리 쓰이는 듯하다. 그만큼 쓰는 사람들도 다양하고 쓰는 용어들도 다양하다. 독일의 미래학자 엥리슈는 저서 <Job Nomaden>에서 이제는 평생직장 개념이 없어지고 한 사람이 다양한 직장을 동시에 가지고 살아가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이런 사람들을 유목민이라고 칭한다. 프랑스 사회학자 쟈크 아탈리는 21세기는 각종 디지털 장비로 무장하고 국경을 넘나드는 Digital Nomad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어디 이뿐인가, 명품과 고급 승용차등 고가 사치품의 소유에 연연하지 않고 많은 봉급보다는 여가를 통한 여행과 레저를 즐기며 주말이면 배낭하나 짊어지고 떠나는 Nobless Nomad도 있다. LG, 삼성 등 각 대기업의 최고경영자들도 Nomad적 경영을 이야기한다. 하물며 전통생태학을 하시는 이도원 선생님의 짧은글들 속에서도 ‘유목민의 의리는?‘ 이라는 글이 등장할 정도다. 이쯤되니 누군가 바야흐로 21세기는 Nomad의 시대라 해도 달리 대꾸할 말이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넘쳐나는 개념들을 우리는 어떻게 살펴봐야 할 것인가. 농경과 유목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역사적 변천과정은 에피타이져요, 작금의 현대사회과 유목사회와의 관계는 메인으로 살펴가면서 덧붙여 징기스칸의 정신까지 최근들어 경제계엔 ‘징기스칸의 경영’과 같은 책이 뜨고 있다고 한다.
디저트로 음미해보기엔 할당된 시간과 지면이 너무나 부족하다. 여기에다 대기업 CEO, 사회학자, 배낭여행을 떠나는 젊은이가 말하는 유목이 각각 어떻게 다른지까지 논하려면 머리에 쥐가 날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 글은 ‘유목민의 의리’에 관한 논평이 아니었던가. 따라서 이글은 다양한 유목민의 면모 중에서도 그들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진행하도록 한다. 농경사회의 관계와 유목사회의 관계는 어떻게 다르며, 유목사회에서 의리라는 개념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가가 앞으로 이 글에서 다룰 주제가 될 것이다.
농경사회와 의리
우선 선생님이 쓰신 글을 살펴보자. 주인공은 진평이고 조연으로 유방이 등장한다. 진평은 우여곡절 끝에 유방에게 등용되어 수많은 지략들을 제공하며 서한왕조 건립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선생님께서 쓰신 것처럼 유방에 한해서만은 의리를 지켰으나, 유방 사후에는 여씨 일족에게 붙어 안위를 도모했고, 여씨 일족의 수장인 여후가 죽자 이번엔 다시 유씨 천하를 세운다며 여씨 일족을 주살했다. 가히 처세의 달인이라 할 만한 사람으로 의리를 논하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다. 선생님 말씀처럼 진평이 유방보다 힘있고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다면 필히 유방을 떠났을 것이다. 진평이 들으면 기분 나쁠지는 몰라도 그의 행적을 보건데 이는 틀림없는 듯하다. 하지만 이 글에서 내가 관심을 가진 부분은 다른 곳에 있다. 진평과 유방의 관계, 즉 군주와 신하의 관계가 그것이다.
흔히 의리하면 친구 사이의 의리를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특히 한국의 의리개념은 그 기원을 유학(특히 성리학)에 두고 있는데, 유학은 인간을 평등한 존재이지만 각 직위에 따라 마땅한 도리를 지닌 존재로 파악한다. 지위가 미리 주어진 만큼, 개인적인 은혜를 입어야지만 의리에 관한 의무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자기에게 주어진 직분을 다하는 것이 진정한 의리로 인식되고, 비록 관계를 맺고 있는 상대가 은혜를 베풀지 않더라도 자기 직분만큼은 충실히 실천해야 한다는 자기 책임을 다하는 자세가 요구되었다(김낙진). 따라서 의리라는 개념은 직위와 상하관계가 분명하게 나뉘는 집단에서 주로 강조되어왔다. (조폭, 사무라이 등) 그리고 이러한 상하관계와 직위가 체계화된 것은 농경사회의 등장에서 비롯한다. 정착에 따른 농경과 함께 잉여생산물이 발생하게 되고 계급이 분화되었다는 것은 정치경제학의 정설이다. 그리고 농경사회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토지소유였기 때문에 이 토지를 타인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힘이 필요했다. 때문에 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군주에게 정치권을 넘기고 그 보호 아래에서 안전하게 경제적인 자유를 누린다는 것이 홉스가 말한 국가, 리바이어던이다. 게다가 성리학은 불교의 심성론의 영향을 받아 의리실천을 인간본질의 실현으로 보는데, 이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개인들의 존재와 행위에 선행하여 의리의 이치 내지 도리가 존재함을 뜻한다(김낙진). 따라서 구체적 개인에 대한 헌신보다는 충의와 같은 직위에 따른 마땅히 정해진 도리가 강조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리를 통해 국가는 다양한 구성원의 욕망을 직위에 따른 분수에 맞춰 조율함으로써 토지의 분배와 소유 체계를 안정화할 수 있었다.
또한 의리라는 개념은 본래 집단을 전제로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농경사회는 토지의 소유와 그 보호를 가장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토지를 보호하기 위해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국가를 형성하게 되고, 국가 내의 토지를 관할하기 위해서 읍, 면, 동, 시 등의 행정구역 개념이 발달하게 된다. 이러한 농경사회에서 한 집단은 다른 집단에 대해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 다른 집단, 다른 국가는 나의 토지를 빼앗을 수 있는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한 집단 내의 가까운 지리적 거리관계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공통의 적으로부터 토지를 보호해야할 뿐 아니라, 이해타산을 넘어서는 돈독한 관계를 통해 이웃과 맞닿아있는 토지의 경계선에 대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의리는 이렇듯 한 집단 내의 구성원들 사이에 지켜야할 도리로 그 집단을 벗어나서는 아무런 효력을 지니지 못한다. 오히려 집단 내의 이익을 위해 타 집단의 구성원에게 비합리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영화에서 주군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복수를 하는 것은 항상 미화되어 나타난다. 게다가 복수의 대상은 언제나 절대악으로 그려진다.)
물론 의리가 이처럼 부정적인 함의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가령 성리학에서는 의리를 우주론적 차원에서 정당화하는데, 자연물도 우주공동체의 일원으로 봄으로써 만물을 동료로 이해하고 의리 실천의 대상으로 여긴다(김낙진). 또한 개인적인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모두에게 절대적으로 행사되는 법이 감당하지 못하는 부분을 전통사회에서는 의리라는 완충지대를 통해 조율하기도 하였다. 불의를 참지 못하고, 은혜를 입으면 개인의 이익관계를 초월해서 헌신하는 모습 역시 지금은 점점 찾기 힘들어진 아름다운 모습이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인 의리 역시 전통사회 내에서만 올바르게 기능한다. 근대 이후 서구의 기독교적 자연관이 유입되면서 더불어 살아갈 동료였던 자연(땅)은 마땅히 정복되고 소유해야할 대상으로 전락했고, 만인에게 일괄적으로 가해지는 법은 의리가 개입할 여지를 없애버렸다. 이제 은혜와 헌신은 사라지고 지연, 혈연, 학연에 기반한 패거리 문화만이 남게 되었다. 도대체 무엇이 변했기에 이렇게 된 걸까.
정보사회의 등장과 의리의 소멸
의리의 소멸, 의리의 속물화가 단지 전통문화가 가진 고매한 정신이 사라지고 관례만이 남았기 때문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그것이 현대에 적합한 개념이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발견하고 이어나갈 여지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대를 넘어 현대(정보사회)에 이르면서 물적 토대와 생활양식 자체가 완전히 변하게 된다. 이는 정보의 흐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농경사회에 기반한 정착문화에서는 정보의 흐름이 활발하지 않기 때문에, 나이가 많을수록 그 지역에 대한 정보를 많이 소유하게 되고 직위가 높을수록 다른 지역으로부터 들어온 고급 정보를 소유할 수 있었다. 따라서 성리학에서 ‘직위에 따라 마땅히 지켜야할 의리(도리)가 다르다‘고 말해도 존중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수직적이긴 하지만 전통사회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정보가 쏟아졌던 근대사회를 지나, 수직과 수평이라는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바바라시의 표현을 빌리자면 수많은 링크,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리좀(rhizome) 뿌리줄기란 뜻으로,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들의 저서 <천의 고원>에서 수목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리좀적 관계에서는 하나의 중심, 즉 본질적 관계가 존재하지 않고, 모든 방향으로 열려있는 다양한 이질성들이 어떻게 만나서 어떻게 배치되는지에 따라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적 관계만이 남게 된 현대에 이르러서는 나이와 직위라는 수직적 체계가 무의미하게 된다. 때문에 기존의 수직적 체계를 정당화했던 의리는 자연히 소멸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현대의 정보전달 관계에 있어서는 의리가 가진 집단성 역시 해체된다. 농경사회에서는 한 번 속한 집단은 거의 영원히 자신이 속한 집단이 된다. 가족은 물론이고, 지역과 국가 역시 한 번 속하면 죽을 때까지 속하게 된다. 이는 근대의 고도성장기에 이르면 평생직장개념으로 이어진다. 사주는 아버지고 사원들은 가족인 것이다. 의리는 이런 집단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양식이기에 집단을 파괴하는 행동은 의리에 위배된다. 따라서 이혼은 악덕이고 정절은 미화되며, 백성의 피폐한 삶엔 무심하고 오직 충의만을 생각하던 정몽주는 자신의 노래처럼 ‘백골이 진토 되어서도’ 충신으로 이름을 떨친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면 집단은 더 이상 영원하지 않다. 타 지역으로의 이사는 물론이요, 해마다 이민은 늘어나고 국적이 다른 사람들이 교류하고 관계를 가진다. 이혼율은 점점 늘어나며 기존의 혈연에 기반한 가족이 아닌 대안가족도 점차 확산되고 있다.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지고 계약직과 프리랜서가 늘어난다. 당연히 ‘우리는 하나‘라는 집단적 정체성 자체가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의리가 평생 수호해야할 집단이 사라진 것이다.
유목민의 의리: 의리에서 신뢰로
현대의 유목민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하에 탄생했다. 광범위한 정보가 사방을 가로지르며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고, 바위처럼 굳건했던 기존의 가치들은 해체되고 재구성된다. 유목민은 이러한 가치의 파편들과 정보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이동한다. 이들은 레고블럭을 쌓는 것처럼 정보를 새롭게 배치하고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낸다. 이는 학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기존의 세분화되고 전문화된 학문들이 이제는 통합적이고 횡단하는 학문으로 전환되고 있다. 한 예로 수유+너머라는 연구단체가 있다. 고미숙, 이진경, 고병권 등 대부분이 박사 이상의 고학력자이면서 기존의 대학에 속하지 않은 이들이 운영하는 연구소로 이들의 전공은 문학, 역사, 사회학, 철학, 수학, 종교학 등 일일이 나누기 힘들만큼 다양하다. 게다가 모여서 자기 전공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다. ‘본래 자기 전공을 까먹을만큼(고미숙)’ 다양한 주제와 학문을 함께 공부한다. 동양고전부터 불교를 거쳐 프랑스현대철학에 이르기까지, 심지어는 한 사람이 매주 열개의 세미나에 참석하기도 한다. 이들에게 기존의 분과 학문의 경계는 농경민이 그어놓은 토지의 경계선에 다름 아니다. 이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다르게 생각해보았다. 선생님께서는 많은 오염물질이 흘러들어오면 쉽게 오염되는 작은 호수를 말씀하셨지만, 오염물질이 나쁜 정보를 의미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나는 과연 좋은 정보와 나쁜 정보가 선험적으로 정해져있는지 의문이다. 대부분의 정보는 그것이 어떻게 배치되는가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지며 유목민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이런 정보들을 배치하는 일이다. 유목민에게 정주하는 집이 없듯이 맑은 호수와 같은 본질(그릇)은 없다. 수유+너머의 연구자들 역시 본래의 전공을 그릇으로 여기고 그것에 다른 것들을 주워 담기보단 오히려 물처럼 흐르면서 배치에 따라 강이나 바다가 되기도 하고 오렌지주스가 되기도 하고 유기체가 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정보의 배치는 그 자체로 레고블럭 쌓기와 같은 놀이가 된다. 그래서 이들은 놀이하듯 학문한다. 세미나에 풍성한 간식과 열띤 수다는 필수고 쉴 때는 제기도 함께 찬다. 그렇게 공부해서 수유+너머에서 일년에 나오는 책의 권수는 열권이 넘는다. 새로운 배치가 새로운 의미를 낳는 것이다.
다시 관계로 돌아가 보자. 유목민이 서로 관계 맺는 방식을 이야기하기 위해선 농경민과 유목민의 이동방식의 차이를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농경민은 점에서 점으로 이동하고 유목민은 선으로 이동한다. 점은 일차적으로 멈춤과 고정, 고착과 결부되어있는 반면에 선은 이동 그 자체의 경로를 말한다. 즉 농경민은 오직 정착하기 위해서만 이동한다. 반면 유목민은 이동하는 도중에 잠시 멈출 뿐이다(이진경). 이러한 차이는 곧 그들의 관계맺음의 차이로 나타난다. 가령 선생님께서 예로 드신 진평의 예를 생각해보자. 만약 진평이 유방을 떠나 다른 군주에게로 갔다고 해도 그것은 유목이 아니다. 유방이라는 한 점에서 다른 군주라는 한 점으로 옮겨가 다시 정착한 것에 불과하다. 진평에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이동의 과정 자체가 아니라 점, 즉 군주와 그 집단이다. 이렇듯 애초부터 점에서 점으로의 이동, 정착을 전제로 한 이동은 유목과 구분되는 이주(migrant)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때문에 이 경우 진평의 배신은 유목민의 의리로 이해해야 할 것이 아니라 농경민의 의리로 이해함이 마땅하다.
그렇다면 유목민은 어떠한가. 유목민에게는 시점과 종점이 중요하지 않다. 어떤 집단을 떠나서 어떤 집단으로 이주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구불구불하고 예측할 수 없는 이동 그 자체가중요하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KTX 타고 두 시간 사십 분 만에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전거를 타더라도 따사로운 햇살과 귓가를 스치는 바람을 느끼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끝없는 이동 중에 속하게 되는 여러 집단들, 만나는 사람들은 잠시 함께하게 된 동반자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관계는 영원성을 전제하지 않기 때문에 의리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기엔 무리가 있다. 게다가 농경민의 경우 토지소유의 개념이 강하기 때문에 이 토지를 떠나 다른 집단으로 가는 것은 잠정적으로 자신의 토지를 위협할 수도 있는 적이 됨을 말한다. 하지만 유목민은 소유하는 무언가가 없기 때문에 헤어짐이 곧 적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끊임없는 이동 중에 언젠가 다시 만날지 모를 소중한 인연이다.(생각해보라 끝없이 광활한 초원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풍경들을!) 때문에 유목민에게 의리보다 적합한 개념은 신뢰가 아닐까 한다. 점과 점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지니고 있지 않고 선의 흐름이라는 이동의 과정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의 만남 모두에 충실할 수 있는, 또한 소유하려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만남들 속에 언제나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유목민들. 그들에겐 집단 속에서만 그 효력을 발휘하는 의리보단, 개인과 개인의 구체적인 만남 속에 맺어지는 신뢰가 중요하지 않을까.
덧붙여
나는 유목민의 가장 큰 특징이 영토화되지 않고 언제나 탈주선을 그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농경민은 자신이 자연을 소유지(영토)로 만드는 만큼, 조직으로부터 국가로부터 자본주의로부터 재영토화된다. 체제에 포섭당하고 길들여진다. 마치 농경지의 작물들이 자라듯 체제의 가치들은 구성원들을 통해 재생산된다. 이렇게 보면 각 대기업의 CEO들이 이야기하는 디지털 노마드는 실은 유목민이 아니다. 최대의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출장을 가서도 회의를 실시간 보고하고, 결재를 맡고, 회사의 이익을 수호하는 이가 무슨 유목민이란 말인가.
들뢰즈가 이야기하듯 유목민은 끊임없이 옮겨다니기 때문에 재영토화되지 않는다. 나는 유목민의 대표적인 인물로 체게바라를 들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카스트로와 달리 그는 착취관계를 전복하는 것, 혁명 그 자체에만 의미를 뒀기 때문에 쿠바 혁명이 성공하고 나서도 쿠바에 머물지 않았다. 그에게는 혁명 전의 쿠바와 혁명 후의 쿠바라는 점과 점의 도식보다는 혁명이라는 하나의 구불구불한 선이 흘러가는 와중에 쿠바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게바라가 혁명하는 삶, 삶 자체로 혁명인 삶에 의미를 뒀기 때문이다. 때문에 카스트로가 독재를 행하며 쿠바 혁명의 의미를 퇴색시킬 때에도 또 다른 혁명의 장에서 사라져간 체게바라는 젊은이들의 영원한 영웅으로 추앙받는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결국 현대의 유목민이란 체제의 가치에 포섭되지 않고 언제나 소수자로 살아가는 모두를 일컫는 말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Reference
이진경. 2002. 노마디즘. 휴머니스트
Deleuze, Z., Guattari F. 김재인 역. 2001. 천 개의 고원. 새물결
고미숙. 2004.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휴머니스트
김낙진. 2004. 의리-공존과 공익을 위한 모색. http://www.sophy.pe.kr
special thanx to pom, ms
유목민의 의리: 의리에서 신뢰로
환경관리 차영래
유행하는 Nomadism
최근들어 유목민(Nomad) 또는 유목주의(Nomadism)라는 개념이 하나의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 정치, 사회, 문화, 예술, 패션, 광고 등 유목이란 단어가 안 쓰이는 분야를 찾기 힘들 정도로 분야를 불문하고 널리 쓰이는 듯하다. 그만큼 쓰는 사람들도 다양하고 쓰는 용어들도 다양하다. 독일의 미래학자 엥리슈는 저서 <Job Nomaden>에서 이제는 평생직장 개념이 없어지고 한 사람이 다양한 직장을 동시에 가지고 살아가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이런 사람들을 유목민이라고 칭한다. 프랑스 사회학자 쟈크 아탈리는 21세기는 각종 디지털 장비로 무장하고 국경을 넘나드는 Digital Nomad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어디 이뿐인가, 명품과 고급 승용차등 고가 사치품의 소유에 연연하지 않고 많은 봉급보다는 여가를 통한 여행과 레저를 즐기며 주말이면 배낭하나 짊어지고 떠나는 Nobless Nomad도 있다. LG, 삼성 등 각 대기업의 최고경영자들도 Nomad적 경영을 이야기한다. 하물며 전통생태학을 하시는 이도원 선생님의 짧은글들 속에서도 ‘유목민의 의리는?‘ 이라는 글이 등장할 정도다. 이쯤되니 누군가 바야흐로 21세기는 Nomad의 시대라 해도 달리 대꾸할 말이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넘쳐나는 개념들을 우리는 어떻게 살펴봐야 할 것인가. 농경과 유목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역사적 변천과정은 에피타이져요, 작금의 현대사회과 유목사회와의 관계는 메인으로 살펴가면서 덧붙여 징기스칸의 정신까지 최근들어 경제계엔 ‘징기스칸의 경영’과 같은 책이 뜨고 있다고 한다.
디저트로 음미해보기엔 할당된 시간과 지면이 너무나 부족하다. 여기에다 대기업 CEO, 사회학자, 배낭여행을 떠나는 젊은이가 말하는 유목이 각각 어떻게 다른지까지 논하려면 머리에 쥐가 날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 글은 ‘유목민의 의리’에 관한 논평이 아니었던가. 따라서 이글은 다양한 유목민의 면모 중에서도 그들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진행하도록 한다. 농경사회의 관계와 유목사회의 관계는 어떻게 다르며, 유목사회에서 의리라는 개념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가가 앞으로 이 글에서 다룰 주제가 될 것이다.
농경사회와 의리
우선 선생님이 쓰신 글을 살펴보자. 주인공은 진평이고 조연으로 유방이 등장한다. 진평은 우여곡절 끝에 유방에게 등용되어 수많은 지략들을 제공하며 서한왕조 건립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선생님께서 쓰신 것처럼 유방에 한해서만은 의리를 지켰으나, 유방 사후에는 여씨 일족에게 붙어 안위를 도모했고, 여씨 일족의 수장인 여후가 죽자 이번엔 다시 유씨 천하를 세운다며 여씨 일족을 주살했다. 가히 처세의 달인이라 할 만한 사람으로 의리를 논하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다. 선생님 말씀처럼 진평이 유방보다 힘있고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다면 필히 유방을 떠났을 것이다. 진평이 들으면 기분 나쁠지는 몰라도 그의 행적을 보건데 이는 틀림없는 듯하다. 하지만 이 글에서 내가 관심을 가진 부분은 다른 곳에 있다. 진평과 유방의 관계, 즉 군주와 신하의 관계가 그것이다.
흔히 의리하면 친구 사이의 의리를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특히 한국의 의리개념은 그 기원을 유학(특히 성리학)에 두고 있는데, 유학은 인간을 평등한 존재이지만 각 직위에 따라 마땅한 도리를 지닌 존재로 파악한다. 지위가 미리 주어진 만큼, 개인적인 은혜를 입어야지만 의리에 관한 의무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자기에게 주어진 직분을 다하는 것이 진정한 의리로 인식되고, 비록 관계를 맺고 있는 상대가 은혜를 베풀지 않더라도 자기 직분만큼은 충실히 실천해야 한다는 자기 책임을 다하는 자세가 요구되었다(김낙진). 따라서 의리라는 개념은 직위와 상하관계가 분명하게 나뉘는 집단에서 주로 강조되어왔다. (조폭, 사무라이 등) 그리고 이러한 상하관계와 직위가 체계화된 것은 농경사회의 등장에서 비롯한다. 정착에 따른 농경과 함께 잉여생산물이 발생하게 되고 계급이 분화되었다는 것은 정치경제학의 정설이다. 그리고 농경사회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토지소유였기 때문에 이 토지를 타인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힘이 필요했다. 때문에 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군주에게 정치권을 넘기고 그 보호 아래에서 안전하게 경제적인 자유를 누린다는 것이 홉스가 말한 국가, 리바이어던이다. 게다가 성리학은 불교의 심성론의 영향을 받아 의리실천을 인간본질의 실현으로 보는데, 이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개인들의 존재와 행위에 선행하여 의리의 이치 내지 도리가 존재함을 뜻한다(김낙진). 따라서 구체적 개인에 대한 헌신보다는 충의와 같은 직위에 따른 마땅히 정해진 도리가 강조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리를 통해 국가는 다양한 구성원의 욕망을 직위에 따른 분수에 맞춰 조율함으로써 토지의 분배와 소유 체계를 안정화할 수 있었다.
또한 의리라는 개념은 본래 집단을 전제로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농경사회는 토지의 소유와 그 보호를 가장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토지를 보호하기 위해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국가를 형성하게 되고, 국가 내의 토지를 관할하기 위해서 읍, 면, 동, 시 등의 행정구역 개념이 발달하게 된다. 이러한 농경사회에서 한 집단은 다른 집단에 대해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 다른 집단, 다른 국가는 나의 토지를 빼앗을 수 있는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한 집단 내의 가까운 지리적 거리관계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공통의 적으로부터 토지를 보호해야할 뿐 아니라, 이해타산을 넘어서는 돈독한 관계를 통해 이웃과 맞닿아있는 토지의 경계선에 대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의리는 이렇듯 한 집단 내의 구성원들 사이에 지켜야할 도리로 그 집단을 벗어나서는 아무런 효력을 지니지 못한다. 오히려 집단 내의 이익을 위해 타 집단의 구성원에게 비합리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영화에서 주군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복수를 하는 것은 항상 미화되어 나타난다. 게다가 복수의 대상은 언제나 절대악으로 그려진다.)
물론 의리가 이처럼 부정적인 함의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가령 성리학에서는 의리를 우주론적 차원에서 정당화하는데, 자연물도 우주공동체의 일원으로 봄으로써 만물을 동료로 이해하고 의리 실천의 대상으로 여긴다(김낙진). 또한 개인적인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모두에게 절대적으로 행사되는 법이 감당하지 못하는 부분을 전통사회에서는 의리라는 완충지대를 통해 조율하기도 하였다. 불의를 참지 못하고, 은혜를 입으면 개인의 이익관계를 초월해서 헌신하는 모습 역시 지금은 점점 찾기 힘들어진 아름다운 모습이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인 의리 역시 전통사회 내에서만 올바르게 기능한다. 근대 이후 서구의 기독교적 자연관이 유입되면서 더불어 살아갈 동료였던 자연(땅)은 마땅히 정복되고 소유해야할 대상으로 전락했고, 만인에게 일괄적으로 가해지는 법은 의리가 개입할 여지를 없애버렸다. 이제 은혜와 헌신은 사라지고 지연, 혈연, 학연에 기반한 패거리 문화만이 남게 되었다. 도대체 무엇이 변했기에 이렇게 된 걸까.
정보사회의 등장과 의리의 소멸
의리의 소멸, 의리의 속물화가 단지 전통문화가 가진 고매한 정신이 사라지고 관례만이 남았기 때문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그것이 현대에 적합한 개념이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발견하고 이어나갈 여지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대를 넘어 현대(정보사회)에 이르면서 물적 토대와 생활양식 자체가 완전히 변하게 된다. 이는 정보의 흐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농경사회에 기반한 정착문화에서는 정보의 흐름이 활발하지 않기 때문에, 나이가 많을수록 그 지역에 대한 정보를 많이 소유하게 되고 직위가 높을수록 다른 지역으로부터 들어온 고급 정보를 소유할 수 있었다. 따라서 성리학에서 ‘직위에 따라 마땅히 지켜야할 의리(도리)가 다르다‘고 말해도 존중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수직적이긴 하지만 전통사회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정보가 쏟아졌던 근대사회를 지나, 수직과 수평이라는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바바라시의 표현을 빌리자면 수많은 링크,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리좀(rhizome) 뿌리줄기란 뜻으로,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들의 저서 <천의 고원>에서 수목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리좀적 관계에서는 하나의 중심, 즉 본질적 관계가 존재하지 않고, 모든 방향으로 열려있는 다양한 이질성들이 어떻게 만나서 어떻게 배치되는지에 따라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적 관계만이 남게 된 현대에 이르러서는 나이와 직위라는 수직적 체계가 무의미하게 된다. 때문에 기존의 수직적 체계를 정당화했던 의리는 자연히 소멸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현대의 정보전달 관계에 있어서는 의리가 가진 집단성 역시 해체된다. 농경사회에서는 한 번 속한 집단은 거의 영원히 자신이 속한 집단이 된다. 가족은 물론이고, 지역과 국가 역시 한 번 속하면 죽을 때까지 속하게 된다. 이는 근대의 고도성장기에 이르면 평생직장개념으로 이어진다. 사주는 아버지고 사원들은 가족인 것이다. 의리는 이런 집단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양식이기에 집단을 파괴하는 행동은 의리에 위배된다. 따라서 이혼은 악덕이고 정절은 미화되며, 백성의 피폐한 삶엔 무심하고 오직 충의만을 생각하던 정몽주는 자신의 노래처럼 ‘백골이 진토 되어서도’ 충신으로 이름을 떨친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면 집단은 더 이상 영원하지 않다. 타 지역으로의 이사는 물론이요, 해마다 이민은 늘어나고 국적이 다른 사람들이 교류하고 관계를 가진다. 이혼율은 점점 늘어나며 기존의 혈연에 기반한 가족이 아닌 대안가족도 점차 확산되고 있다.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지고 계약직과 프리랜서가 늘어난다. 당연히 ‘우리는 하나‘라는 집단적 정체성 자체가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의리가 평생 수호해야할 집단이 사라진 것이다.
유목민의 의리: 의리에서 신뢰로
현대의 유목민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하에 탄생했다. 광범위한 정보가 사방을 가로지르며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고, 바위처럼 굳건했던 기존의 가치들은 해체되고 재구성된다. 유목민은 이러한 가치의 파편들과 정보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이동한다. 이들은 레고블럭을 쌓는 것처럼 정보를 새롭게 배치하고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낸다. 이는 학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기존의 세분화되고 전문화된 학문들이 이제는 통합적이고 횡단하는 학문으로 전환되고 있다. 한 예로 수유+너머라는 연구단체가 있다. 고미숙, 이진경, 고병권 등 대부분이 박사 이상의 고학력자이면서 기존의 대학에 속하지 않은 이들이 운영하는 연구소로 이들의 전공은 문학, 역사, 사회학, 철학, 수학, 종교학 등 일일이 나누기 힘들만큼 다양하다. 게다가 모여서 자기 전공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다. ‘본래 자기 전공을 까먹을만큼(고미숙)’ 다양한 주제와 학문을 함께 공부한다. 동양고전부터 불교를 거쳐 프랑스현대철학에 이르기까지, 심지어는 한 사람이 매주 열개의 세미나에 참석하기도 한다. 이들에게 기존의 분과 학문의 경계는 농경민이 그어놓은 토지의 경계선에 다름 아니다. 이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다르게 생각해보았다. 선생님께서는 많은 오염물질이 흘러들어오면 쉽게 오염되는 작은 호수를 말씀하셨지만, 오염물질이 나쁜 정보를 의미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나는 과연 좋은 정보와 나쁜 정보가 선험적으로 정해져있는지 의문이다. 대부분의 정보는 그것이 어떻게 배치되는가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지며 유목민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이런 정보들을 배치하는 일이다. 유목민에게 정주하는 집이 없듯이 맑은 호수와 같은 본질(그릇)은 없다. 수유+너머의 연구자들 역시 본래의 전공을 그릇으로 여기고 그것에 다른 것들을 주워 담기보단 오히려 물처럼 흐르면서 배치에 따라 강이나 바다가 되기도 하고 오렌지주스가 되기도 하고 유기체가 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정보의 배치는 그 자체로 레고블럭 쌓기와 같은 놀이가 된다. 그래서 이들은 놀이하듯 학문한다. 세미나에 풍성한 간식과 열띤 수다는 필수고 쉴 때는 제기도 함께 찬다. 그렇게 공부해서 수유+너머에서 일년에 나오는 책의 권수는 열권이 넘는다. 새로운 배치가 새로운 의미를 낳는 것이다.
다시 관계로 돌아가 보자. 유목민이 서로 관계 맺는 방식을 이야기하기 위해선 농경민과 유목민의 이동방식의 차이를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농경민은 점에서 점으로 이동하고 유목민은 선으로 이동한다. 점은 일차적으로 멈춤과 고정, 고착과 결부되어있는 반면에 선은 이동 그 자체의 경로를 말한다. 즉 농경민은 오직 정착하기 위해서만 이동한다. 반면 유목민은 이동하는 도중에 잠시 멈출 뿐이다(이진경). 이러한 차이는 곧 그들의 관계맺음의 차이로 나타난다. 가령 선생님께서 예로 드신 진평의 예를 생각해보자. 만약 진평이 유방을 떠나 다른 군주에게로 갔다고 해도 그것은 유목이 아니다. 유방이라는 한 점에서 다른 군주라는 한 점으로 옮겨가 다시 정착한 것에 불과하다. 진평에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이동의 과정 자체가 아니라 점, 즉 군주와 그 집단이다. 이렇듯 애초부터 점에서 점으로의 이동, 정착을 전제로 한 이동은 유목과 구분되는 이주(migrant)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때문에 이 경우 진평의 배신은 유목민의 의리로 이해해야 할 것이 아니라 농경민의 의리로 이해함이 마땅하다.
그렇다면 유목민은 어떠한가. 유목민에게는 시점과 종점이 중요하지 않다. 어떤 집단을 떠나서 어떤 집단으로 이주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구불구불하고 예측할 수 없는 이동 그 자체가중요하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KTX 타고 두 시간 사십 분 만에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전거를 타더라도 따사로운 햇살과 귓가를 스치는 바람을 느끼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끝없는 이동 중에 속하게 되는 여러 집단들, 만나는 사람들은 잠시 함께하게 된 동반자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관계는 영원성을 전제하지 않기 때문에 의리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기엔 무리가 있다. 게다가 농경민의 경우 토지소유의 개념이 강하기 때문에 이 토지를 떠나 다른 집단으로 가는 것은 잠정적으로 자신의 토지를 위협할 수도 있는 적이 됨을 말한다. 하지만 유목민은 소유하는 무언가가 없기 때문에 헤어짐이 곧 적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끊임없는 이동 중에 언젠가 다시 만날지 모를 소중한 인연이다.(생각해보라 끝없이 광활한 초원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풍경들을!) 때문에 유목민에게 의리보다 적합한 개념은 신뢰가 아닐까 한다. 점과 점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지니고 있지 않고 선의 흐름이라는 이동의 과정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의 만남 모두에 충실할 수 있는, 또한 소유하려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만남들 속에 언제나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유목민들. 그들에겐 집단 속에서만 그 효력을 발휘하는 의리보단, 개인과 개인의 구체적인 만남 속에 맺어지는 신뢰가 중요하지 않을까.
덧붙여
나는 유목민의 가장 큰 특징이 영토화되지 않고 언제나 탈주선을 그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농경민은 자신이 자연을 소유지(영토)로 만드는 만큼, 조직으로부터 국가로부터 자본주의로부터 재영토화된다. 체제에 포섭당하고 길들여진다. 마치 농경지의 작물들이 자라듯 체제의 가치들은 구성원들을 통해 재생산된다. 이렇게 보면 각 대기업의 CEO들이 이야기하는 디지털 노마드는 실은 유목민이 아니다. 최대의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출장을 가서도 회의를 실시간 보고하고, 결재를 맡고, 회사의 이익을 수호하는 이가 무슨 유목민이란 말인가.
들뢰즈가 이야기하듯 유목민은 끊임없이 옮겨다니기 때문에 재영토화되지 않는다. 나는 유목민의 대표적인 인물로 체게바라를 들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카스트로와 달리 그는 착취관계를 전복하는 것, 혁명 그 자체에만 의미를 뒀기 때문에 쿠바 혁명이 성공하고 나서도 쿠바에 머물지 않았다. 그에게는 혁명 전의 쿠바와 혁명 후의 쿠바라는 점과 점의 도식보다는 혁명이라는 하나의 구불구불한 선이 흘러가는 와중에 쿠바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게바라가 혁명하는 삶, 삶 자체로 혁명인 삶에 의미를 뒀기 때문이다. 때문에 카스트로가 독재를 행하며 쿠바 혁명의 의미를 퇴색시킬 때에도 또 다른 혁명의 장에서 사라져간 체게바라는 젊은이들의 영원한 영웅으로 추앙받는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결국 현대의 유목민이란 체제의 가치에 포섭되지 않고 언제나 소수자로 살아가는 모두를 일컫는 말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Reference
이진경. 2002. 노마디즘. 휴머니스트
Deleuze, Z., Guattari F. 김재인 역. 2001. 천 개의 고원. 새물결
고미숙. 2004.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휴머니스트
김낙진. 2004. 의리-공존과 공익을 위한 모색. http://www.sophy.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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