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년만에 금요모임 참가. ^^
화성에 위치한 석포시인님의 별장 몽우제에서 맛난 것들을 먹으며 즐겁게 책 토론.
특히 이번에 새로이 참가하신 Mr. 장 아저씨의 생생한 체험이 곁들여진 이야기는, 스스로를 오래 돌아보게 했다.
스스로가 원하는 것에 대해 분명히 인식하고, 관계에 있어 최소한의 그것만을 요구하고, 또한 상대 역시 그러하길 바라는 것. 자의식이 강하고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 중 하나일게다. 물론 이들이 연애를 할 때 상대 역시 그런 사람이긴 쉽지 않으니, 그걸 장 아저씨처럼 삶 속에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분은 많지 않고, 대부분이 일정한 타협을 거치게 되지만.
장아저씨의 태도는 어떻게 보면 스스로를 관계속의 나가 아닌 독립되고 유일한 개체로 생각하고, 관계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해갈 것을 믿지 않는, 더구나 스스로뿐 아니라 관계 역시 자연스레 변화해갈 것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다.
하지만 오랜 세월간 다양한 경험(실험)을 거치며 자신이 결국은 변할 수 없는 인간임을 절절히 깨닫게 된 이의 무게를 나는 또한 절절히 느꼈기 때문에, 함부로 반박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그런 자신을 인정하는 태도, 그리고 상대에게 자신은 어떠한 인간임을 밝히는 솔직한 태도는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것이 상대에게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나중에 상처를 주고 나서도 '그래서 내가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라고 말한 건덕지가 되긴 하지만. 세상엔 그만큼 스스로를 밝히지 못하는 인간이 얼마나 많은가.
사랑, 이란 단어에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드시던 장아저씨.
그 단어가 가지는 불확실성과 포괄성, 개인마다의 다른 이해들에서 오는 오해들이 끔찍하신 듯.
아, 또 그러셨지. 얽히기 싫다고.
그렇다면 나는 무언가. 그 분의 말씀에 절절히 공감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선 다른 욕망들이 자리한다.
마치 골룸과 스미골의 대화처럼, 마음의 한 쪽만 비치는 거울을 본 것처럼 불편하면서도 확실히 이해하는 마음.
얽히지 못한 관계는 기본적으로 심심하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는 나는 아직 젊은건가. ^^)
-갑자기 쌍쌍바를 반으로 정확하게 자르려면 봉지를 뜯지 않고 겉에서 잘라야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내가 상대에게 원하는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은 감정의 권력자였고, 적어도 감정적인 부분에선 원할게 없을 정도로 상대에게 받기 때문 아닐지. (사랑의 양이 절대적으로 많고 적음을 떠나, 상대가 나보다 더 사랑할때 이 욕구는 대부분 충족된다.)
상처주기 싫은 마음은 결국 그 상처에 대해 책임지기 싫은 마음. 죄의식을 스스로 설정하고 거기에 속박된 자의 모습.
상대에게 준 상처들은 언제나 화살처럼 내게 꽂혀서 결국 나의 상처가 된다. 거울상이기 때문에 형태와 성질만 다를 뿐.
사랑받고 싶은 욕구와 사랑받음에 대한 두려움의 모순, 그 깊은 곳엔 내 열등감이 자리잡고 있다.
잘은 알 수 없지만 내보일 수 없는, 자기만의 그런게 있는거겠지.
그것까지 지금의 내가 극복할 수 있을거라곤 말할 수 없으니까.
천천히 그런 나를, 지금의 내가 가진 모순된 욕구들을 우선 인정하고 그것에 솔직해지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또한 이제는 정말, 사랑받기 위해 관리하지 않은 내 모습 솔직하게 드러내려 노력할 뿐이다.
근데 진짜 본능적이란 말이지. 그런건. 외부적인 기준에 따른 나의 비도덕적이거나 나쁜 모습,약한 모습 등은 조금만 친해도 서슴없이 말할 수 있는데 말이지. 결국 상대에게 미움 받을 모습-그걸 본능적으로 정확히 아는 것 아닐까-은 결코 내보이려 하지 않거든. 다 드러냈을 때 사랑받을 수 있다는 자신이 결국엔 없으니까.
사랑받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면(표면적으론 받고 싶은 욕구는 전혀 없는 축이지만) 이렇게 -어떤 면에선- 비뚤어진다.
에잇, 잘해보자. 장아저씨 이야긴 한 번 잘 정리해봐야겠다.
화성에 위치한 석포시인님의 별장 몽우제에서 맛난 것들을 먹으며 즐겁게 책 토론.
특히 이번에 새로이 참가하신 Mr. 장 아저씨의 생생한 체험이 곁들여진 이야기는, 스스로를 오래 돌아보게 했다.
스스로가 원하는 것에 대해 분명히 인식하고, 관계에 있어 최소한의 그것만을 요구하고, 또한 상대 역시 그러하길 바라는 것. 자의식이 강하고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 중 하나일게다. 물론 이들이 연애를 할 때 상대 역시 그런 사람이긴 쉽지 않으니, 그걸 장 아저씨처럼 삶 속에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분은 많지 않고, 대부분이 일정한 타협을 거치게 되지만.
장아저씨의 태도는 어떻게 보면 스스로를 관계속의 나가 아닌 독립되고 유일한 개체로 생각하고, 관계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해갈 것을 믿지 않는, 더구나 스스로뿐 아니라 관계 역시 자연스레 변화해갈 것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다.
하지만 오랜 세월간 다양한 경험(실험)을 거치며 자신이 결국은 변할 수 없는 인간임을 절절히 깨닫게 된 이의 무게를 나는 또한 절절히 느꼈기 때문에, 함부로 반박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그런 자신을 인정하는 태도, 그리고 상대에게 자신은 어떠한 인간임을 밝히는 솔직한 태도는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것이 상대에게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나중에 상처를 주고 나서도 '그래서 내가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라고 말한 건덕지가 되긴 하지만. 세상엔 그만큼 스스로를 밝히지 못하는 인간이 얼마나 많은가.
사랑, 이란 단어에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드시던 장아저씨.
그 단어가 가지는 불확실성과 포괄성, 개인마다의 다른 이해들에서 오는 오해들이 끔찍하신 듯.
아, 또 그러셨지. 얽히기 싫다고.
그렇다면 나는 무언가. 그 분의 말씀에 절절히 공감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선 다른 욕망들이 자리한다.
마치 골룸과 스미골의 대화처럼, 마음의 한 쪽만 비치는 거울을 본 것처럼 불편하면서도 확실히 이해하는 마음.
얽히지 못한 관계는 기본적으로 심심하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는 나는 아직 젊은건가. ^^)
-갑자기 쌍쌍바를 반으로 정확하게 자르려면 봉지를 뜯지 않고 겉에서 잘라야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내가 상대에게 원하는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은 감정의 권력자였고, 적어도 감정적인 부분에선 원할게 없을 정도로 상대에게 받기 때문 아닐지. (사랑의 양이 절대적으로 많고 적음을 떠나, 상대가 나보다 더 사랑할때 이 욕구는 대부분 충족된다.)
상처주기 싫은 마음은 결국 그 상처에 대해 책임지기 싫은 마음. 죄의식을 스스로 설정하고 거기에 속박된 자의 모습.
상대에게 준 상처들은 언제나 화살처럼 내게 꽂혀서 결국 나의 상처가 된다. 거울상이기 때문에 형태와 성질만 다를 뿐.
사랑받고 싶은 욕구와 사랑받음에 대한 두려움의 모순, 그 깊은 곳엔 내 열등감이 자리잡고 있다.
잘은 알 수 없지만 내보일 수 없는, 자기만의 그런게 있는거겠지.
그것까지 지금의 내가 극복할 수 있을거라곤 말할 수 없으니까.
천천히 그런 나를, 지금의 내가 가진 모순된 욕구들을 우선 인정하고 그것에 솔직해지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또한 이제는 정말, 사랑받기 위해 관리하지 않은 내 모습 솔직하게 드러내려 노력할 뿐이다.
근데 진짜 본능적이란 말이지. 그런건. 외부적인 기준에 따른 나의 비도덕적이거나 나쁜 모습,약한 모습 등은 조금만 친해도 서슴없이 말할 수 있는데 말이지. 결국 상대에게 미움 받을 모습-그걸 본능적으로 정확히 아는 것 아닐까-은 결코 내보이려 하지 않거든. 다 드러냈을 때 사랑받을 수 있다는 자신이 결국엔 없으니까.
사랑받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면(표면적으론 받고 싶은 욕구는 전혀 없는 축이지만) 이렇게 -어떤 면에선- 비뚤어진다.
에잇, 잘해보자. 장아저씨 이야긴 한 번 잘 정리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