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폭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상대의 변화를 요구하고, 그렇지 못함에 불같이 화를 내고.
그러한 행위는 나의 영역에 대한 침범으로 받아들였고, 따라서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 말하고 행하는지, 이해하면서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아니, 이해할 수 없었다.
나 역시, 이해받고 싶었지만 이해받을 수 없었다. 이해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해의 문제에 있어, 상대가 실제로 나를 이해하는가와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는가의 문제는 다르다.
전자가 실제라면 후자는 믿음인데, 전자는 확인할 수 없으며 또한 완성될 수 없기 때문에 지향으로만 존재한다.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이해했다고 느끼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서로 미끄러져간다. 관계에서 중요한건 오히려 후자다. 상대가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실제 상대의 역량, 이해정도와는 크게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믿음은 나의 태도를 변화시키고, 실제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영원히 반복되는 그 미끄러짐을 즐길 수 있게 하고, 노력하게 한다.
그때는 그런 믿음이 없었다.
상대의 태도에 대한 이질감과 거부감이 알게모르게 나의 태도를 완고하고, 고집스럽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나'라는 영역은 점점 굳어졌고, 굳어져 갈수록 상대는 나의 자유를 억압하고, 항상 무언가를 요구하고, 폭력을 행하는 존재가 되어갔다.
피곤했고, 지쳐갔다. 관계의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본래 생산량보다 과다 투입되어햐는 에너지는, 생산체계에 무리를 주며 시스템을 파괴해갔다. 시스템의 점차적인 붕괴는 에너지 생산량 저하로 이어졌고, 결국엔 아무것도 생산해낼 수 없게 되었다. 관계는 버려진 폐광처럼 쓸쓸하고 어두운 동굴로 덩그라니 남아, 동굴 안엔 각자의 목소리만 공허한 메아리로 울려퍼졌다. 그렇게 끝이 났다.
다시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고,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사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만남.
이상하게도 이번엔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논리적으로 따지려 들지도 않고, 나의 옳음을 주장하지도 않았다.
나의 영역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하지도 않았다.
인정해달라고 주장하지 않고, 배려해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상대가 감정을 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길 바라고, 그것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믿는다.
설득하기 보단 공감하려 하고, 변화하려 한다.
놀랍다고 생각했다.
감정과 시기의 문제일까?
열정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예의 그렇듯,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상대의 마음을 얻고 싶어하고, 이후 관계가 정착 된 후엔 다시 이전의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지루하고 반복적인 연애의 패턴.
아니었다.
나는 자신을 잃을만큼 열정에 휩싸여있는 상태도 아니고, 그만큼 부자연스러운 에너지가 들어가지도 않았다.
다시 생각했다.
왜 나는 지금의 '나', 자아의 경계가 희미한 '나'를 자연스럽고 편히 여기는가?
분명 지금까지의 나를 돌이켜보면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기까지 한 모습이다.
한참동안 나를 들여다보곤, 내 사유과정과 느낌을 곱씹어보곤, 결국 그 근저에는 어떤 믿음이 깔려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사람은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이해해주고, 또한 배려할 거란 믿음.
자신이 이해받음을 내세우기 보단, 상대를 이해하려는 생각을 먼저할거란 믿음.
그 믿음은 실제로 상대가 그런 사람인가와는 크게 관련이 없을지도 모르고, 그건 중요하지도 않다. 그런 믿음과 느낌을 주는 사람인지 아닌지가 중요할 뿐.
다만 이는 상대의 표현 방식과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 어느정도 검증될 수 있다.
지향과 현실의 차이를 모순 자체로 표현하기.
변화를 요구하기 보단, 자신의 느낌과 생각과 힘듦을 그냥 표현하기.
그 과정이 상대와 나의 유사성을 발견하게 해주고, 공감을 이끌어낸다.
반대의 상황에서 나또한 그럴 수 있음을 인정하게 한다.
표면으로 드러나진 않았던 나의 모순까지도 나는 순순히 인정하고, 모순과 모순이 만나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하게 된다.
논리적 옳고 그름. 도덕적 선/악의 대립과 투쟁으로 인한 해결이 아닌,
이해와 공감을 통한 해결에 비로소 다다른다.
전자는 해결 과정에서도 엄청난 에너지가 들고, 일시적 해결 후에도 승자(설득한 이)와 패자(설득 당한 이)만 있을 뿐 불만이 남는다면, 후자는 해결과정에서도 에너지가 거의 들지 않고, 해결 이후엔 보다 돈독하고 상호이해적인 관계를 가능케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나는, 이전의 관계에서 나에게 가해졌다고 생각했던 폭력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실은 상대의 직설적인 요구와 표현은 솔직함이었던 것 같다.
다만 나의 수용여부가 고려되지 않았고, 그렇게 느끼고 표현하는데 이르기 까지의 과정이 생략되었을 뿐.
나는 이해할 수 없었고, 배려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때문에 나의 영역에 대한 침해라고 생각했었고, 거부감과 에너지 소모가 컸던거고.
서로에 대한 투쟁과 서로 납득할 수 없는 어설픈 약속만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의 가장 밑바닥엔 내가 이해받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뭐, 슬프지만 그러한 흐름이 당시의 나였고, 나의 관계였다.
아마 나는 무의식적으로, 상대는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 사람이라 전제했고,
때문에 나 역시 상대를
이해하고 싶지 않은 사람. (그 모든 사고체계와 표현양식을, 그리고 그를 둘러싼 세계를)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
이라고 생각했던 것 아닐까.
다시 한 번
중요한건
이해하는가가 아니라, 이해하고 싶은가이고
이해받는가가 아니라, 이해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상대의 변화를 요구하고, 그렇지 못함에 불같이 화를 내고.
그러한 행위는 나의 영역에 대한 침범으로 받아들였고, 따라서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 말하고 행하는지, 이해하면서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아니, 이해할 수 없었다.
나 역시, 이해받고 싶었지만 이해받을 수 없었다. 이해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해의 문제에 있어, 상대가 실제로 나를 이해하는가와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는가의 문제는 다르다.
전자가 실제라면 후자는 믿음인데, 전자는 확인할 수 없으며 또한 완성될 수 없기 때문에 지향으로만 존재한다.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이해했다고 느끼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서로 미끄러져간다. 관계에서 중요한건 오히려 후자다. 상대가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실제 상대의 역량, 이해정도와는 크게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믿음은 나의 태도를 변화시키고, 실제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영원히 반복되는 그 미끄러짐을 즐길 수 있게 하고, 노력하게 한다.
그때는 그런 믿음이 없었다.
상대의 태도에 대한 이질감과 거부감이 알게모르게 나의 태도를 완고하고, 고집스럽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나'라는 영역은 점점 굳어졌고, 굳어져 갈수록 상대는 나의 자유를 억압하고, 항상 무언가를 요구하고, 폭력을 행하는 존재가 되어갔다.
피곤했고, 지쳐갔다. 관계의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본래 생산량보다 과다 투입되어햐는 에너지는, 생산체계에 무리를 주며 시스템을 파괴해갔다. 시스템의 점차적인 붕괴는 에너지 생산량 저하로 이어졌고, 결국엔 아무것도 생산해낼 수 없게 되었다. 관계는 버려진 폐광처럼 쓸쓸하고 어두운 동굴로 덩그라니 남아, 동굴 안엔 각자의 목소리만 공허한 메아리로 울려퍼졌다. 그렇게 끝이 났다.
다시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고,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사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만남.
이상하게도 이번엔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논리적으로 따지려 들지도 않고, 나의 옳음을 주장하지도 않았다.
나의 영역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하지도 않았다.
인정해달라고 주장하지 않고, 배려해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상대가 감정을 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길 바라고, 그것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믿는다.
설득하기 보단 공감하려 하고, 변화하려 한다.
놀랍다고 생각했다.
감정과 시기의 문제일까?
열정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예의 그렇듯,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상대의 마음을 얻고 싶어하고, 이후 관계가 정착 된 후엔 다시 이전의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지루하고 반복적인 연애의 패턴.
아니었다.
나는 자신을 잃을만큼 열정에 휩싸여있는 상태도 아니고, 그만큼 부자연스러운 에너지가 들어가지도 않았다.
다시 생각했다.
왜 나는 지금의 '나', 자아의 경계가 희미한 '나'를 자연스럽고 편히 여기는가?
분명 지금까지의 나를 돌이켜보면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기까지 한 모습이다.
한참동안 나를 들여다보곤, 내 사유과정과 느낌을 곱씹어보곤, 결국 그 근저에는 어떤 믿음이 깔려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사람은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이해해주고, 또한 배려할 거란 믿음.
자신이 이해받음을 내세우기 보단, 상대를 이해하려는 생각을 먼저할거란 믿음.
그 믿음은 실제로 상대가 그런 사람인가와는 크게 관련이 없을지도 모르고, 그건 중요하지도 않다. 그런 믿음과 느낌을 주는 사람인지 아닌지가 중요할 뿐.
다만 이는 상대의 표현 방식과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 어느정도 검증될 수 있다.
지향과 현실의 차이를 모순 자체로 표현하기.
변화를 요구하기 보단, 자신의 느낌과 생각과 힘듦을 그냥 표현하기.
그 과정이 상대와 나의 유사성을 발견하게 해주고, 공감을 이끌어낸다.
반대의 상황에서 나또한 그럴 수 있음을 인정하게 한다.
표면으로 드러나진 않았던 나의 모순까지도 나는 순순히 인정하고, 모순과 모순이 만나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하게 된다.
논리적 옳고 그름. 도덕적 선/악의 대립과 투쟁으로 인한 해결이 아닌,
이해와 공감을 통한 해결에 비로소 다다른다.
전자는 해결 과정에서도 엄청난 에너지가 들고, 일시적 해결 후에도 승자(설득한 이)와 패자(설득 당한 이)만 있을 뿐 불만이 남는다면, 후자는 해결과정에서도 에너지가 거의 들지 않고, 해결 이후엔 보다 돈독하고 상호이해적인 관계를 가능케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나는, 이전의 관계에서 나에게 가해졌다고 생각했던 폭력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실은 상대의 직설적인 요구와 표현은 솔직함이었던 것 같다.
다만 나의 수용여부가 고려되지 않았고, 그렇게 느끼고 표현하는데 이르기 까지의 과정이 생략되었을 뿐.
나는 이해할 수 없었고, 배려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때문에 나의 영역에 대한 침해라고 생각했었고, 거부감과 에너지 소모가 컸던거고.
서로에 대한 투쟁과 서로 납득할 수 없는 어설픈 약속만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의 가장 밑바닥엔 내가 이해받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뭐, 슬프지만 그러한 흐름이 당시의 나였고, 나의 관계였다.
아마 나는 무의식적으로, 상대는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 사람이라 전제했고,
때문에 나 역시 상대를
이해하고 싶지 않은 사람. (그 모든 사고체계와 표현양식을, 그리고 그를 둘러싼 세계를)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
이라고 생각했던 것 아닐까.
다시 한 번
중요한건
이해하는가가 아니라, 이해하고 싶은가이고
이해받는가가 아니라, 이해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