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의 가치기준

2005. 1. 12. 15:19 |
우리는 흔히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에 비춰볼 때 인간의 사고 자체가 언어의 체계속에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고, 언어 자체가 그 자체로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사물과 사물사이의 차이(그것도 물론 인간의 인식 능력안에서)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볼 때 '나'라는 것을 인식하는 과정 역시 남들과의 차이를 통해서라는 것은 필연적인 과정인 듯 하다.

하지만 문제는 그 '차이'라는 것이 결코 가치중립적이지 않으며 사실상 권력관계를 형성한다는데 있다.(또한 대부분 반생태적이다.) 특히 법,윤리,도덕,국가 등 자의적,타의적 규제속에서 자신을 종속시키며 살아가는 인간으로서는 그 '차이'라는 것이 이러한 제도적 틀 안에서 용인 될 수 있는 것이라야 하고,이 때문에 '차이'란 것은 현재의 가장 큰 틀 '자본주의'라는 제도 속에서 용인 될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예쁜 옷과 알록달록한 염색부터 시작하여 자동차 튜닝, 홈 인테리어, 심지어 컴퓨터 케이스 튜닝에 이르기 까지 이러한 차이를 통한 정체성 형성은 대부분이 자본의 투입이 있고 나서야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본의 투입이 과할 경우 그 차이는 결국 빈부차의 반영으로 매듭지어 지며 이는 결국 차이가, 가진자와 못 가진자의 권력관계를 형성하게 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는 분명 과다한 환원의 오류로 염색,패션,튜닝 등에 나타난 개인의 성향차와 미적 감각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때문에 여기서는 라깡의 힘을 빌어 반발을 무마해 보자 한다.
(사실 염색,패션,튜닝등으로 인한 차이가 자신의 미적감각,혹은 성향차 에 기반한 것이라기 보다는 실은 TV와 광고가 '창출'해낸 욕망에 기반한 것이라고 바로 반박 할 수 도 있다.)
먼저 '차이'를 통한 정체성 확보란 것은 기본적으로 인정 욕망을 반영한다. 타인과 나는 다르니 나를 나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 정체성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인정의 주체는 누구인가? 당연히 타자이다. 라깡의 이론을 빌어 설명하면 인간은 유아기의 세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이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인 남근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버지로 인해 깨닫게 되고 (이 때 상징적 거세가 일어난다.) 이러한 자신의 욕망은 어머니가 인정하는 대상이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환유된다. 즉 착한 아이, 성실한 아이 등등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런 욕망은 근본적으로 어머니의 남근이 되려는 욕망을 만족시켜 줄 수 가 없기 때문에 그 욕망은 끊임없이 환유되어가며 새로운 대상을 찾아가게 된다.이 때 인정의 주체 역시 어머니에서 타자로 환유되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의 궁극적으로 채울 수 없는 욕망은 필연적으로 억압을 야기하게 되고 이에서 발생하는 것이 무의식의 영역이라고 라깡은 말한다. 라깡의 이론에서 내가 끌어오고 싶은 부분은 '차이'를 통한 정체성 확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 입각한 것이며 따라서 근본적으로 채워질 수 없는, 그리고
끊임없이 대상을 바꿔갈 욕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차이는 허무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근본적으로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이 문제라기 보다는 처음에 언급한 차이는 그 자체로 멈춰 있음에 문제가 있는 것이며 끊임없이 극한에 도전하는 '차이'의 과정, 그것 자체가 이미 정체성의 확보요 '구원'이 아닐까 .(이는 마치 사람은 결국 죽는다. 그렇다면 그의 삶은 의미가 없는가? 허무한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과 같다)'결과가 아닌 과정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보편적이면서도 깨닫기 힘든 진리다.

그렇다면 멈춰 있지 않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극한으로 밀고 가는 차이란 무엇인가? 나는 이 질문에 대해 두가지 기준을 제시해 볼까 한다.

첫째로 '차이'는 생성을 전제로 해야 한다.
생성을 가지고 물질적인 예를 드는 건 쉽지 않지만 예컨데 승용차를 튜닝해서 차이를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승용차를 타지 않고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함으로서 책읽을 시간과 사유할 시간을 만드는 것이 '생성'을 위한 차이에 가까운 것 아닌가 하는 것이다. 비싼 옷(물론 예쁘겠지)을 입음으로서 그보다 싼 옷을 입은 이와의 차이를 부각시킴은 '빈부격차강화'라는 위계적 생성만을 낳을 뿐이다.(그건 여기서 쓰이는 생성의 개념이 아니다) 관념적인 예로는 어떤 지식을 습득하지 못한 자와 자신과의 차이를 통해 우월감과 정체성을 형성하기 보다는 자신이 습득한 지식을 기반으로 그와 차이가 나는 또 다른 이론을 생성해 내는 것에서 정체성을 획득함이 옳다 할 수 있다.

둘째로 차이는 '차이 자체를 억압하는 제도'에 반하는 형태로 생성되어야 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우리가 생각하는 홈 인테리어니 염색이니 패션이니 하는 것들의 대부분이 TV와 광고가 창출해 낸 것이다. 문제는 창출한 것을 따르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창출된 차이에 만족함으로 인해 그 제도 자체를 용인하고 강화시키며 그 제도가 억압하는 다른 차이(가령 국가보안법의 문제, 혹은 성적 소수자의 문제)를 인정하는 데에 이바지 한다는 것이다. 이는 '차이'의 범위 자체를 제도적 틀내로 제한하는 것으로 '개성'을 이야기 하는 이들 스스로의 주장과 모순 되는 것임에 분명하다. 때문에 '차이'는 '차이에 대한 억압'에 반하는 형태의 차이여야 한다.

'평범한 건 싫어'라는 최근의 흐름이 그것을 끊임없이 재생산 할 수 있는 긍정적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2002
Posted by nar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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