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새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아마 다섯 시가 조금 안 되었을 것이다. 눈을 뜨지 않아도 그쯤은 알 수가 있다. 이 동네의 새들은 왠지 모르지만 항상 그 시간쯤 되면 울음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기온의 변화 탓인지 명도의 변화 탓인지는 알 수가 없었고 알 필요도 없었다. 그런걸 밝혀내는 건 이리저리 분석하기 좋아하는 학자들의 몫이지 나의 몫은 아니니까. 이유보단 현상 그 자체가 중요할 때가 종종 있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열 번을 연이어 울리는 자명종 소리도 깨우지 못 하는 나의 잠을, 왜 가늘게 재잘거리는 이름모를 새 소리가 단번에 깨우는 지도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또 한번 마찬가지로 그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다섯 시면 서둘러 챙겨야 직장에 지각하지 않을 시간이다. 나는 조금 뒤척일 여유를 즐기지 못 하는 게 못 내 아쉽지만 이내 이를 털어내고 잠자리를 정리한다. 그리곤 냉장고를 열어 생수를 한 잔 들이킨 뒤 사과 하나를 베어문다. 이어서 부시시한 머리를 대충 감고 양치를 하면 대충의 준비는 끝이 난다.
직장까지는 걸어서 10여분 거리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거리엔 사람들이 뜸하다. 대부분의 상가들도 채 아침을 맞이하지 않았고 각종 패스트푸드점만 자기네 상표의 간판을 자랑하고 있다. 항상 같은 풍경이다. 누구는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댔지만 내가 보기엔 세상은 그렇게 변하는 것이 없다. 십 년 전이든 백 년 전이든 아침에 쌀밥을 먹고 일을 나가는 사람이 있고, 사과 하나를 베어물고 일을 나가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다만 거기에 덧붙이는 소소한 이유가 다를 뿐이다. 이런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직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확실히 나의 직장은 다소 가까운 편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루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직장을 내가 선택한 유일한 이유다.
오늘은 성북행 첫차를 몰기로 되어있다. 5시57분에 출발하는 이 지하철은 그나마 첫차 중 가장 늦은편에 속하기에 나는 알람을 맞추지 않고 잠에 들 수 있었다. 5시 16분 인천행 차를 모는 날이면 열 번도 넘는 알람소리를 듣느라 머리가 깨어질 것만 같다. 어떤 날은 옆집에서 항의가 들어 올만큼 계속 울려대는데도 나는 당최 깨어나질 못 한다. 머리가 깨어질 것 같은 것과 잠을 깨는 것은 별개라서 나는 꿈속에서 머리를 싸매고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끝내 깨어나진 못 하는 것이다. 운이 좋아 예닐곱번째에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알람소리를 견디다 못한 개가 물어뜯고 핥아대는 통에 겨우 일어난다. 참, 이 개는 그냥 개다. 키운지가 벌써 3년째이지만 아직 이름이 없다.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사는 것이라 이름없는 것이 그리 불편할 일은 없지만 가끔 녀석을 불러야 할 때면 조금 불편할 때가 있다. 하지만 할 수 없다. 대상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것을 다른 것과 구별을 하고 그것에 독자적이면서 주관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신성한 행위인데 나는 이런 신성성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니 나는 완벽히 승무원의 모습이 되었다. 제복이란 것은 어찌나 힘이 강한지 이렇게 허술한 나도 옷 하나를 걸침으로서 그에 걸맞는 권위를 부여받게 된다. 이제 승객들은 내 말 한마디에 따라 열차에 오르내릴 것이다. 재판장에서 판사가 법복을 입는 이유도 이에 다름아니다. 대체 그가 법복을 입지 않는다면 누가 자신에게 내리는 징역을 고분고분히 따를 것인가. 아무튼 세상은 이렇게 교묘한 장치로 각종 권위와 권력 구조를 인간 스스로 따르도록 만들고 이를 통제한다. 그러면서 스스로는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간다. 물론 혹자는 그 통제의 주체가 돈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자기 회사 사장이라고 하며, 또 누군가는 자기 마누라라고도 하지만 사실 그것은 누구도 모르는 것이다. 나 역시 이런 생각을 오래하면 알람이 스무 번은 울리는 것처럼 머리만 아플 뿐이기에 그냥저냥 심심할 때 슬쩍 떠올려보는 정도에서 그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직업은 너무 따분해서 금새 졸음이 오기 때문이다.
이윽고 지하철에 오른 나는 마이크로 성북행 첫차의 출발을 알리고 카메라로 승객의 탑승을 확인 한 뒤 문을 닫았다. 그리곤 출발이다. 지하철 운전은 그 조작의 여부와 관계없이 단순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마치 바둑을 두는 것처럼 시커먼 터널과 환한 플랫폼을 한 번씩 번갈아 가며 지나간다. 조금의 예외도 없다. 물르는 것도 없다.
승강장의 간격은 오 분을 채 넘지 않기 때문에 한 눈을 팔기는 어렵지만 조금 익숙해지면 각 감각기관이 이에 적응해 별 생각을 하지 않아도 습관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이런 상태가 되면 그 때부터 정신은 온전히 육체를 떠나 상상의 공간을 부유하게 되는 것이다. 아, 하지만 이렇게 폐쇄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상상이란 일정한 범위를 벗어날 수 없게 마련이다. 상상은 수소풍선처럼 둥실둥실 떠오르다 지하철 천정에 부딪혀 맥없이 터져버린다. 때문에 언제나 참을 수 없는 지루함과 시커먼 고독 속에 매일을 꾸역꾸역 몰아넣는 수밖에... 그리고 그 한계치를 슬쩍 넘어서려고 할 때면 나의 일과는 끝이 난다. 퇴근 후엔 집 근처 음식점에서의 간단한 식사와 맥주 한 병, 자기 전엔 1시간 가량의 독서. 변화가 숨어있을 곳은 쥐구멍만큼이라도 있을 턱이 없다.
갑자기 주위가 환해진다. 아래를 보니 어느덧 오른손이 브레이크를 내리고 있었다. 지금은 빛의 영역. 수많은 사람들이 이동을 한다. 얼마간의 사람들이 내리고 또 얼마간의 사람들이 올라탄다. 카메라엔 문이 닫히기 일보 직전에 슬라이딩하는 묘기를 부리며 차에 오르는 승객이 눈에 들어온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을 잠깐 열었다 닫는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문이 닫히는 바로 그 순간. 지하철이 출발하기 위해 몸을 떨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 손목부터 소름이 돋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어깨를 지나 허벅지 아래까지 온몸을 덮어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지하철이 '출입금지'라 적힌 푯말을 지나 어둠의 영역으로 접어 들었을때 극에 달했다. 습기 찬 어둠과 격렬한 바람. 텅 빈 칠흑의 고요를 지하철의 심장소리가 가득 매워 들어갈 때 나는 갑작스레 형언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다음 빛을 향한 통로에 지나지 않았던 이곳, 지루하기만 했던 그 어둠의 영역이 갑자기 그 어떤 빛의 영역보다 매혹적인 모습으로 내 피부를 파고들었다. 지하철 곳곳에 설치된 형광등, 만겁의 세월을 쏟아져내린 태양광을 모방한 조잡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빛은 낡음과 지루함만을 야기한다. 프로메테우스가 형광등을 보면 통탄의 눈물을 흘릴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 어둠, 태고적 신비를 간직하면서 태양보다 역사를 오래하는 유일한 공간은 지금 나를 만나 완벽히 새로워지고 있었다. 나는 어둠의 세례를 듬뿍 받고 지루함과 고독을 먼지 한 톨도 남기지 않고 털어버릴 수 있었으며 그 공간은 열정과 사랑의 정열적인 에너지로 충만하게 채워졌다. 그렇다. 나는 이 어둠을 어느새 미치도록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하지만 그것은 이미 인식의 영역을 벗어나 있었다. 그것은 가만히 온 몸을 잠식해가다 일순간 발병하는 전염병처럼 순간적이면서 격렬하게 온 몸을 먹어 들어갔다. 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이 매혹. 따뜻한 자궁을 벗어나 30년을 기다려온 절정의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내 삶은 이 어둠 속에서만 그 빛을 확인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루에도 수 만 명이 범하는 식상한 빛의 영역에 반해 이곳이야말로 지금껏 그 누구도 침범하지 못한 금단의 영역이자 이를 탐했던 수많은 이들이 그와 동화되어 무(無)가 되어버린 신화의 영역인 것이었다. 아니, 그것은 '무(無)'도 아니었다. 그저 아무 것도 아닌 것, 이름 붙여지지 않은 유일한 것.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삶은 따분했고 그것은 십 년이든 이십 년이든 변할 의지가 없는 듯 했다. 언제나 그렇듯 인간은 끊임없이 대상을 잘게 쪼개어 마치 신인 양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고 그들에게 '의미'를 강요하여 불행하게 할 것이다. 도대체 인간의 '의미'란 것이 그것이 이름 붙여진 것에게도 '의미'인 적이 있었던가. 이 씁쓸한 폭력은 문명이 계속되는 한 지속될 것인가. 아, 다시 알람 스무 번이 울리려 한다. 더 이상의 생각은 고통스럽기만 할 뿐.
그렇게 해서 나는 성북행 첫 차 첫 칸의 문을 열었고 빛나는 어둠 속으로 나를 용해시켰다. 내 몸이 떨어지는 소리는 거대한 지하철의 소음에 눌려 누구도 듣지 못 했을 것이다.
다음날 나는 5시 16분 인천행 첫 차를 모느라 십 수 번의 알람이 울린 후 어김없이 개에게 얼굴을 물어 뜯겨야 했다.
다섯 시면 서둘러 챙겨야 직장에 지각하지 않을 시간이다. 나는 조금 뒤척일 여유를 즐기지 못 하는 게 못 내 아쉽지만 이내 이를 털어내고 잠자리를 정리한다. 그리곤 냉장고를 열어 생수를 한 잔 들이킨 뒤 사과 하나를 베어문다. 이어서 부시시한 머리를 대충 감고 양치를 하면 대충의 준비는 끝이 난다.
직장까지는 걸어서 10여분 거리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거리엔 사람들이 뜸하다. 대부분의 상가들도 채 아침을 맞이하지 않았고 각종 패스트푸드점만 자기네 상표의 간판을 자랑하고 있다. 항상 같은 풍경이다. 누구는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댔지만 내가 보기엔 세상은 그렇게 변하는 것이 없다. 십 년 전이든 백 년 전이든 아침에 쌀밥을 먹고 일을 나가는 사람이 있고, 사과 하나를 베어물고 일을 나가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다만 거기에 덧붙이는 소소한 이유가 다를 뿐이다. 이런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직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확실히 나의 직장은 다소 가까운 편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루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직장을 내가 선택한 유일한 이유다.
오늘은 성북행 첫차를 몰기로 되어있다. 5시57분에 출발하는 이 지하철은 그나마 첫차 중 가장 늦은편에 속하기에 나는 알람을 맞추지 않고 잠에 들 수 있었다. 5시 16분 인천행 차를 모는 날이면 열 번도 넘는 알람소리를 듣느라 머리가 깨어질 것만 같다. 어떤 날은 옆집에서 항의가 들어 올만큼 계속 울려대는데도 나는 당최 깨어나질 못 한다. 머리가 깨어질 것 같은 것과 잠을 깨는 것은 별개라서 나는 꿈속에서 머리를 싸매고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끝내 깨어나진 못 하는 것이다. 운이 좋아 예닐곱번째에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알람소리를 견디다 못한 개가 물어뜯고 핥아대는 통에 겨우 일어난다. 참, 이 개는 그냥 개다. 키운지가 벌써 3년째이지만 아직 이름이 없다.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사는 것이라 이름없는 것이 그리 불편할 일은 없지만 가끔 녀석을 불러야 할 때면 조금 불편할 때가 있다. 하지만 할 수 없다. 대상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것을 다른 것과 구별을 하고 그것에 독자적이면서 주관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신성한 행위인데 나는 이런 신성성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니 나는 완벽히 승무원의 모습이 되었다. 제복이란 것은 어찌나 힘이 강한지 이렇게 허술한 나도 옷 하나를 걸침으로서 그에 걸맞는 권위를 부여받게 된다. 이제 승객들은 내 말 한마디에 따라 열차에 오르내릴 것이다. 재판장에서 판사가 법복을 입는 이유도 이에 다름아니다. 대체 그가 법복을 입지 않는다면 누가 자신에게 내리는 징역을 고분고분히 따를 것인가. 아무튼 세상은 이렇게 교묘한 장치로 각종 권위와 권력 구조를 인간 스스로 따르도록 만들고 이를 통제한다. 그러면서 스스로는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간다. 물론 혹자는 그 통제의 주체가 돈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자기 회사 사장이라고 하며, 또 누군가는 자기 마누라라고도 하지만 사실 그것은 누구도 모르는 것이다. 나 역시 이런 생각을 오래하면 알람이 스무 번은 울리는 것처럼 머리만 아플 뿐이기에 그냥저냥 심심할 때 슬쩍 떠올려보는 정도에서 그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직업은 너무 따분해서 금새 졸음이 오기 때문이다.
이윽고 지하철에 오른 나는 마이크로 성북행 첫차의 출발을 알리고 카메라로 승객의 탑승을 확인 한 뒤 문을 닫았다. 그리곤 출발이다. 지하철 운전은 그 조작의 여부와 관계없이 단순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마치 바둑을 두는 것처럼 시커먼 터널과 환한 플랫폼을 한 번씩 번갈아 가며 지나간다. 조금의 예외도 없다. 물르는 것도 없다.
승강장의 간격은 오 분을 채 넘지 않기 때문에 한 눈을 팔기는 어렵지만 조금 익숙해지면 각 감각기관이 이에 적응해 별 생각을 하지 않아도 습관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이런 상태가 되면 그 때부터 정신은 온전히 육체를 떠나 상상의 공간을 부유하게 되는 것이다. 아, 하지만 이렇게 폐쇄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상상이란 일정한 범위를 벗어날 수 없게 마련이다. 상상은 수소풍선처럼 둥실둥실 떠오르다 지하철 천정에 부딪혀 맥없이 터져버린다. 때문에 언제나 참을 수 없는 지루함과 시커먼 고독 속에 매일을 꾸역꾸역 몰아넣는 수밖에... 그리고 그 한계치를 슬쩍 넘어서려고 할 때면 나의 일과는 끝이 난다. 퇴근 후엔 집 근처 음식점에서의 간단한 식사와 맥주 한 병, 자기 전엔 1시간 가량의 독서. 변화가 숨어있을 곳은 쥐구멍만큼이라도 있을 턱이 없다.
갑자기 주위가 환해진다. 아래를 보니 어느덧 오른손이 브레이크를 내리고 있었다. 지금은 빛의 영역. 수많은 사람들이 이동을 한다. 얼마간의 사람들이 내리고 또 얼마간의 사람들이 올라탄다. 카메라엔 문이 닫히기 일보 직전에 슬라이딩하는 묘기를 부리며 차에 오르는 승객이 눈에 들어온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을 잠깐 열었다 닫는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문이 닫히는 바로 그 순간. 지하철이 출발하기 위해 몸을 떨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 손목부터 소름이 돋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어깨를 지나 허벅지 아래까지 온몸을 덮어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지하철이 '출입금지'라 적힌 푯말을 지나 어둠의 영역으로 접어 들었을때 극에 달했다. 습기 찬 어둠과 격렬한 바람. 텅 빈 칠흑의 고요를 지하철의 심장소리가 가득 매워 들어갈 때 나는 갑작스레 형언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다음 빛을 향한 통로에 지나지 않았던 이곳, 지루하기만 했던 그 어둠의 영역이 갑자기 그 어떤 빛의 영역보다 매혹적인 모습으로 내 피부를 파고들었다. 지하철 곳곳에 설치된 형광등, 만겁의 세월을 쏟아져내린 태양광을 모방한 조잡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빛은 낡음과 지루함만을 야기한다. 프로메테우스가 형광등을 보면 통탄의 눈물을 흘릴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 어둠, 태고적 신비를 간직하면서 태양보다 역사를 오래하는 유일한 공간은 지금 나를 만나 완벽히 새로워지고 있었다. 나는 어둠의 세례를 듬뿍 받고 지루함과 고독을 먼지 한 톨도 남기지 않고 털어버릴 수 있었으며 그 공간은 열정과 사랑의 정열적인 에너지로 충만하게 채워졌다. 그렇다. 나는 이 어둠을 어느새 미치도록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하지만 그것은 이미 인식의 영역을 벗어나 있었다. 그것은 가만히 온 몸을 잠식해가다 일순간 발병하는 전염병처럼 순간적이면서 격렬하게 온 몸을 먹어 들어갔다. 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이 매혹. 따뜻한 자궁을 벗어나 30년을 기다려온 절정의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내 삶은 이 어둠 속에서만 그 빛을 확인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루에도 수 만 명이 범하는 식상한 빛의 영역에 반해 이곳이야말로 지금껏 그 누구도 침범하지 못한 금단의 영역이자 이를 탐했던 수많은 이들이 그와 동화되어 무(無)가 되어버린 신화의 영역인 것이었다. 아니, 그것은 '무(無)'도 아니었다. 그저 아무 것도 아닌 것, 이름 붙여지지 않은 유일한 것.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삶은 따분했고 그것은 십 년이든 이십 년이든 변할 의지가 없는 듯 했다. 언제나 그렇듯 인간은 끊임없이 대상을 잘게 쪼개어 마치 신인 양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고 그들에게 '의미'를 강요하여 불행하게 할 것이다. 도대체 인간의 '의미'란 것이 그것이 이름 붙여진 것에게도 '의미'인 적이 있었던가. 이 씁쓸한 폭력은 문명이 계속되는 한 지속될 것인가. 아, 다시 알람 스무 번이 울리려 한다. 더 이상의 생각은 고통스럽기만 할 뿐.
그렇게 해서 나는 성북행 첫 차 첫 칸의 문을 열었고 빛나는 어둠 속으로 나를 용해시켰다. 내 몸이 떨어지는 소리는 거대한 지하철의 소음에 눌려 누구도 듣지 못 했을 것이다.
다음날 나는 5시 16분 인천행 첫 차를 모느라 십 수 번의 알람이 울린 후 어김없이 개에게 얼굴을 물어 뜯겨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