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일기 2005. 1. 27. 03:32 |
드물게 일정이 없는 날.

2주간 사진을 안 찍었더니 금단 현상이 일어나, 해소하기로 마음 먹다.
특별하게 가고 싶은 곳이 없었기 때문에 한강에 갔다.

한강에 가면 고등학교 때 생각이 난다.
고3 때는 대부분의 시간을 독서실에서 보냈는데, 매주 한 번은 펜을 집어던지고 바다로 가는 버스를 탔다. 115-1번, 아직도 기억이 난다. 열심히 밤길을 달려 20여분이면 해운대에 나를 내려주던 버스.날씨가 따뜻한 날은 옹기종기 앉아있는 연인들 때문에 바다만 보고 돌아오곤 했지만, 조금 쌀쌀한 날엔 홀로 앉은 이들이 많아 나도 그 틈에 끼여 몇시간이고 파도소리를 듣곤했다.

아, 한강에도 여러가지 기억이 있다.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이었나, 룸메이트가 면허를 땄다며 고향에서 어머니 차를 몰고 올라왔다.
빨간색 티코였는데, 문제는 이 넘이 날더러 드라이브를 가자며 꼬시는 것이었다. 녀석이 면허를 딴지 일주일도 안 됐던 터라, 사양하려고 했는데 한강에 가자는 말에 그만 넘어가고 말았다. 서울와서는 제대로 된 '물'을 못 봐서 뭔가 불만족에 시달리던 차였다.'신출면허라도 안동서 서울까지 몰고 온 거 보면 실력은 있겠지'라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차가 출발하고 나서야 나는 그게 너무나도 나이브한 생각이었다는걸 알았다. 정문을 나서자마자 끼익하며 급정거가 시작되더니 앞으로 가야할 차가 뒤로가지를 않나, 앞 차 뒷범퍼가 순식간에 코앞에 아른거리질 않나, 위기의 연속이었다. 참말로 그때는 최소한 응급실 간판은 볼 줄 알았다. 하지만 겨울의 새벽 두시에 한강을 가는 차가 그리 많은 건 아니어서인지, 다행히도 목적지엔 도착. 큰 물을 보고나니 그간의 위기는 강물따라 흘러가버렸다. 둘 다 그때 상황이 그리 신통친 않았나보다. 한강에다 대고 냅다 고함을 지르면서 새해의 소망을 마구마구 빌었던 기억이 있는 걸 보면.
무슨 소망이었더라. 내용은 생각이 나질 않는다. 암튼 좀 유치했던 소망이었던 것 같다.

오늘의 한강은 그때의 바다와 그때의 강과 비슷했다.
인적이 드물었고, 물이 꽤 맑았다.
나는 강 가의 벤치에 앉아서 사람들을 구경했다.
연을 날리는 아저씨들, 조깅을 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 점심 먹고 농땡이 피우는 공익요원 정도가 넓은 고수부지를 점거하고 있었다. 수요일 오후에, 것도 오늘처럼 겨울 중의 조금 포근한 날씨에, 이렇게 넓은 공간에서 제각각 놀이와 운동에 열중하는 몇 안되는 사람을 보고 있으면, 한없이 나른한 기분이 되어버린다.
마치 햇빛이 비치는 공원 벤치의 고양이처럼, 졸린 눈으로 사람들을 둘러 보다 가르릉거리며 잠들어 버릴 것 같다.
'그래. 세상은 천천히, 그렇지만 확실히 돌아가고 있군'하며 안심하게 된다고나 할까.

한참을 그렇게 몽상에 빠져있다가, 근질거리는 손꾸락의 애절한 호소에 본래의 목적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 사진을 찍어야지.

사진을 찍고 영풍문고엘 갔더니 재미난 책이 많이 나와있었다.
이것저것 훑어보다 한 권 집어들고는 구석탱이에 죽치고 앉아 다 읽어버렸다. 그리고 뒷표지의 가격을 본다.
만오천원. 작가에겐 미안하지만, 어째 돈 벌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꽤 재밌어서 살까말까 나오기전까지도 망설였는데 결국엔 안샀다. 인연이 있다면 다음에 만나겠지.라고 합리화하며. (생각해보면 옷살때도 비슷하다, 다입어보고 맞춰보고하다 결국 안사고 나오면서,그래도  사고싶으면 언젠가 사겠지라고 합리화한다. 뭐 절반쯤은 일주일 뒤에 다시 찾아가서 그때 봐놓은 걸로 사와버리긴한다. 성격인가보다. -_-)

충무로에서 현상을 기다리는 두 시간은 너무 지루하다. 조금 더 오래 걸렸으면 그냥 맡겨두고 올텐데, 애매한 두 시간이라 그냥 기다리게 된다. 사진기 구경하고, 들어가서 만져보고, 커피마시며 책보고 하면 시간이야 잘 가지만 오늘처럼 피곤한 날엔 얼른 집에 들어가고 싶단 말이지. 자가현상을 하던가 혀야지.

일기 끝. 내일은 또 빡빡한 하루. -_-
Posted by nar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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