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한 번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하루키 책 읽기 페스티벌' -_-
보통 해야할 일이 많으나 무진장 하기 싫은 시즌에 열리곤 한다.
올해는 어둠의 저편- 양을 쫓는 모험- 상실의 시대 순.
(얼마전 새 것 같은 상실의 시대를 단돈 3000천원에 헌책방에서 구입했다)
양을 쫓는 모험은 세 번째, 상실의 시대는 이번이 네 번째(혹은 다섯번째).
얽힌게 많은 책이다. 상실의 시대는.
읽다보면 이런저런 사람들과 이런저런 행동들이 떠오르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명은 죽는 날 그런 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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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코는 '나를 꼭 기억해 주었으면 해요' 라고 말했지만
서른일곱의 와타나베는 그녀의 모습을 기억할 수 없다.
사람의 기억은 불완전한 것이어서 즐거운 일도, 슬픈 일도
시간이 지나면 그 느낌이 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랑했다는 그 사실만큼은 부정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
스물 셋.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사랑을 간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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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나는 명이 사용한 '부정'이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이제 스물 셋의 명을 등지고 나는 스물 다섯이 되었다. 모두가 그 시간에서 떠나왔다. 그리고 그만이 그 시간 속에 남았기 때문에, 그 시간은 그의 시간이 되었다.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매일이 새롭고 즐거운 화양연화라면, 그것은 화양연화가 아닐꺼라고. 화양연화는 배타적이며 절대적이다. 같은 강도와 같은 행복감에도 불구하고 같지 않은, 자신만의 의미부여가 들어있는 유일한 순간이므로. 같은 의미로 무언가 빛나던 것이 소진되고 망가졌다면, 그 자리엔 새로운 것이 생겨나고 다시 빛나기도, 이전의 것보다 더욱 밝을지도 모르지만, 역시 그것은 전의 그것은 아니라고.
그 순간의 절대성은 그 순간이 가장 빛났기 때문에, 행복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단지, 그가 그 순간에 걸었던 것이 다른 순간과 달랐을 뿐이다. 모든 것, 나의 모든 물성과 정신성을 내맡기는 순간이 두 번 찾아올 수 있을까. 인간이 두 번 폐허가 되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그것은 유일한 사랑의 형태도 아니고 바람직한 사랑의 형태라고 할 수도 없다. 다만 그러한 사랑은 인간의 본질적인 어떤 부분을 변형시킨다. 폐허가 된 인간은 영원히 폐허의 흔적을 떨쳐버리지 못하기도 하고, 새로운 태양아래 새롭게 초원을 이루기도 하지만, 다시 폐허가 되진 않는다. 한 번의 폐허 뒤엔, 역설적으로 폐허이기에 생겨나는 무언가가 있어 폐허의 원형질을 지우고 만다. 때문에 폐허는 두 번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단 생각이 든다.
그래서 화양연화는 화양연화로 존재한다. 노병이 죽지 않고 사라지는 것처럼, 화양연화 역시 침식당하거나 부정당하지 않고 그저 사라지는 것이다.
보통 해야할 일이 많으나 무진장 하기 싫은 시즌에 열리곤 한다.
올해는 어둠의 저편- 양을 쫓는 모험- 상실의 시대 순.
(얼마전 새 것 같은 상실의 시대를 단돈 3000천원에 헌책방에서 구입했다)
양을 쫓는 모험은 세 번째, 상실의 시대는 이번이 네 번째(혹은 다섯번째).
얽힌게 많은 책이다. 상실의 시대는.
읽다보면 이런저런 사람들과 이런저런 행동들이 떠오르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명은 죽는 날 그런 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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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코는 '나를 꼭 기억해 주었으면 해요' 라고 말했지만
서른일곱의 와타나베는 그녀의 모습을 기억할 수 없다.
사람의 기억은 불완전한 것이어서 즐거운 일도, 슬픈 일도
시간이 지나면 그 느낌이 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랑했다는 그 사실만큼은 부정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
스물 셋.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사랑을 간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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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나는 명이 사용한 '부정'이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이제 스물 셋의 명을 등지고 나는 스물 다섯이 되었다. 모두가 그 시간에서 떠나왔다. 그리고 그만이 그 시간 속에 남았기 때문에, 그 시간은 그의 시간이 되었다.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매일이 새롭고 즐거운 화양연화라면, 그것은 화양연화가 아닐꺼라고. 화양연화는 배타적이며 절대적이다. 같은 강도와 같은 행복감에도 불구하고 같지 않은, 자신만의 의미부여가 들어있는 유일한 순간이므로. 같은 의미로 무언가 빛나던 것이 소진되고 망가졌다면, 그 자리엔 새로운 것이 생겨나고 다시 빛나기도, 이전의 것보다 더욱 밝을지도 모르지만, 역시 그것은 전의 그것은 아니라고.
그 순간의 절대성은 그 순간이 가장 빛났기 때문에, 행복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단지, 그가 그 순간에 걸었던 것이 다른 순간과 달랐을 뿐이다. 모든 것, 나의 모든 물성과 정신성을 내맡기는 순간이 두 번 찾아올 수 있을까. 인간이 두 번 폐허가 되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그것은 유일한 사랑의 형태도 아니고 바람직한 사랑의 형태라고 할 수도 없다. 다만 그러한 사랑은 인간의 본질적인 어떤 부분을 변형시킨다. 폐허가 된 인간은 영원히 폐허의 흔적을 떨쳐버리지 못하기도 하고, 새로운 태양아래 새롭게 초원을 이루기도 하지만, 다시 폐허가 되진 않는다. 한 번의 폐허 뒤엔, 역설적으로 폐허이기에 생겨나는 무언가가 있어 폐허의 원형질을 지우고 만다. 때문에 폐허는 두 번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단 생각이 든다.
그래서 화양연화는 화양연화로 존재한다. 노병이 죽지 않고 사라지는 것처럼, 화양연화 역시 침식당하거나 부정당하지 않고 그저 사라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