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섹스에 대하여 / 여산
글 2006. 6. 28. 00:33 |코엘류의 11분을 읽으면서 그가 조금은 상투적이지만 타고난 이야기꾼임을 확인한다. 한 사람의 ‘뻔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쓸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한편, 이 이야기는 우화(寓話)라기 보더는 극히 사실적 소설이다. 이 소설을 우화로만 보는 이들은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아직 섹스가 무엇인지, 에로틱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이 아닐까 한다. (이 책을 읽으며 작가가 말하는 내용들이 일전에 캐나다의 Jean Benoit의 작품을 보고 썼던 에로티시즘에 대한 나의 생각과 너무 유사함에 조금 놀랐다.)
이 책에서는 섹스란 단순한 몸짓에 불과한 욕망의 만남이 아니라 존재와 존재의 만남이 될 수 있다는 진정한 섹스의 모양을 보여준다. 비록 많은 젊은이들은 서로 벗고 숨을 헐떡거리고 쾌감이 지나간 것으로 섹스를 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단지 욕망의 모습을 한 생식의 몸짓이다. 그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몸짓이 섹스라고 굳게 믿고 있으면서, 이것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향해 가는 여러 길 중의 하나일 것임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지극히 공감할 수 있는 말로써,
<섹스라는 욕망을 통해 원하는 것은 단순한 젖가슴이나 몸이 아니고 상대의 존재라는 것을 안다면 가장 큰 쾌락은 행위 자체가 아니라 행위에 담겨있는 정열이다. ...(略) 치열하게 살아가는 존재는 매순간 희열을 느낀다. 그에게는 섹스가 전혀 아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성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은 뭔가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삶의 부름에 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욕망의 몸짓에 불과한 섹스를 하면서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많은 젊은이들은 결코 존재를 향한 거의 종교에 가까운 정열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이러한 이들은 나이를 들어가면서 결혼, 가족, 그리고 사회적으로 평온한 가정이라는 이름 속에 진부해져가는 자신의 존재와 함께 평생 그 섹스 이상의 것을 알지 못하고 죽어간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사회에서 남자들이 소위 ‘영계’라 해서 어린 여자들만 좋아하는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들은 섹스도 존재가 만나는 방법 중의 하나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저 여자를 인간 이전에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는 대상이나 수단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물론 존재와 존재의 대등한 만남은 이 책에서 보여주듯 헌신적인 고통이나 섹스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싣달타는 극한 고통을 수반하는 고행을 하다가 그것이 결코 바람직한 방법이 아님을 깨닫고 자연스런 상태에서 명상을 통해 온 우주의 존재와 만날 수 있었다.
(종교 문화 속에서 고통을 통한 우주적 존재와의 합일을 시도하는 것은 책에서 언급된 중세 성직자들에서 보듯이 매우 흔한 일이다. 반드시 성적 취향으로서의 SM-sadomasochism-의 형태가 아니라도 말이다.)
하지만 단순한 욕망의 몸짓이 아닌 서로 열린 마음과 상대에 대한 존중과 집중으로 행해진 섹스로부터 개인의 지극한 자유와 평화로움을 맛보게 되는 것은 참으로 축복받은 일이다. 어쩌면 종교적으로나 얻을 수 있는 지극한 상태를 우리가 어려운 명상이나 종교적 헌신 없이 손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종교 역사상 기독교 문화에서 뿐만 아니라 탄트라 좌파불교 등, 섹스를 통해 신/진리와의 합일을 시도한 예가 매우 많다. 하지만 그러한 시도는 결과적으로 모두 실패했고 외도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섹스라는 수행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행하던 이들의 문제였음은 잘 알려져 있다. 많은 이들이 점차 섹스가 주는 쾌락을 통해 얻게 되는 자유와 평화를 찾기보다는 욕망의 만족을 주는 쾌락에 길들여져 갔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대부분 욕망의 몸짓에 길들여져 있는 이들은 이러한 섹스를 통해서 존재가 만날 수 있다는 그러한 가능성마저 지니지 않게 된다. 주위를 돌아보아도 빛을 잃어 버린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책에서는 ‘빛’이라 표현되어 있고, 현실적으로는 특정한 상대가 느낄 수 있는 성적 에너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한편, 어떠한 방법으로 경험하던 (섹스, 참선, 명상 등등) 이미 타 존재와의 합일을 경험한 이들에게 욕망의 배설로서의 구체적 몸짓은 더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사람들은 간혹 내게 묻는다. 10여년 이상 혼자 살면서 그런 문제는 어떻게 풀어 가느냐고. 참선을 통해 서로 둘이 아닌 존재의 참모습을 경험할 수 있었던 나로서는 그러한 경험이 없는 그들에게 그것을 간단히 설명해 주기가 어렵다. 간혹 설명을 해주어도 그들은 내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들 식으로 이해한다. 그들은 내가 체험한 것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코엘류는 이 부분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섹스라는 욕망을 통해 원하는 것은 단순한 젖가슴이나 몸이 아니고, 상대의 존재라는 것을 안다면 가장 큰 쾌락은 행위 자체가 아니라 행위에 담겨있는 정열이다. ... 치열하게 살아가는 존재는 매순간 희열을 느낀다. 그에게는 섹스가 전혀 아쉽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중요한 것은 행위를 넘은 그 무엇인 것이다. 소설에서는 ‘존재의 빛’, ‘존재의 만남’ 등으로 표현되어 있는 그것이다. 자신들의 욕망의 몸짓이 섹스의 전부인 줄로 알고 있는, 즉 체험해 보지 못한 이들에게 이 점이 납득되기는 어려운 일이기에 아마도 사람들은 이 11분이라는 책을 우화라고도 보는 것 같다. 이들의 '문화'에서는 이 책에서 언급된 것 같이 성기의 삽입 없이도 얼마나 충실한 섹스가 가능한지는 상상하지도 못한다.
그러한 문화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욱 단순한 몸짓에 길들여져 있고 행위 자체에 집착하여 이 여자, 저 여자 상대를 가리지 않고 탐욕스럽게 되어간다. 관계한 여자의 숫자는 계속 늘어갈지는 몰라도 이들에게는 섹스 이상의 것이란 결코 있지 않는 것이기에 그들은 존재의 소통을 결코 알지 못하고, 항상 외로운 행위일 뿐이다. 코엘류의 말처럼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지 않고 있기에 외로워하면서 욕망의 몸짓만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이 책에서 언급된 그러한 ‘빛’을 지닌 여성은 그리 흔하지 않다 (내가 남성이기에 여성만을 언급하게 된다). 이 ‘빛’은 나이나 사회적 신분, 믿고 있는 종교, 성경험의 장단 등에 전혀 상관없이 보여 지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섹스라는 단순 몸짓에 길들여져 있는 대부분의 일반인들에게서 이러한 빛을 지닌 사람을 보기는 참 어렵다.
그렇기에 섹스를 하면서 존재 간의 만남을 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그러한 이성이라면 10년을 기다려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또 그러한 기다림 속에 평생 못 만난다 해도 후회되지 않을 것이다. 코엘류의 표현대로 진정한 쾌락은 상대와의 섹스라는 행위가 아니라 행위에 담겨 있는 정열이요, 이 정열로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표현으로서는 삶 속의 기다림의 자세이다).
참선을 통한 개인적 체험 이후 지난 10여년 동안 이러한 ‘빛’을 느끼게 하는 여성을 본 것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전체적으로 말한다면 성경험이 조금은 있는 비교적 젊은 여성에서 볼 수 있다 (성을 너무 몰라도 이러한 빛은 잘 안나타난다). 간혹 드물기는 하지만 나이가 있어도 이러한 느낌을 주는 여성도 있다.
한편, 이러한 빛을 지니고 있어도 그 빛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미 단순한 몸짓으로서의 섹스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러한 행위에 멈추어있거나, 아니면 심리적으로 자신을 가두고 있는 소극적 경우가 그렇다.
섹스를 통해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얻으려면 행위에 참여한 두 사람 모두 삶에 대한 적극적 자세(책에서의 여주인공의 자세가 그렇다)와 깨어있음을 바탕으로 상대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집중으로 서로에게 자신을 열 때 가능하다.
나 자신도 참선을 통한 개인적 체험을 하지 않았다면 이 책을 우화로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의 삶이란 생물적인 섹스를 포함해 그 무엇을 하던 간에 궁극적으로 너와 나라는 존재의 만남을 향해 나아가는 것임을 알고 있기에 내가 보기에 이 책은 ‘섹스가 무엇인지 아는 이의 지극히 사실적인 이야기’에 바탕을 둔 소설이다.
이 책을 덮으면서 그동안 나에게 외롭지 않느냐, 어떻게 오랫동안 혼자 지낼 수 있느냐라고 묻던 이들에게는 그 대답으로서 미소와 더불어 밑에 남기는 나의 시(詩) 한편과 문학적으로 그리 뛰어난 작품은 아닌 뻔한 이 책을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욕망의 쾌락뿐인 가십성의 수백 번의 몸짓보다는 단 한 번의 존재의 열락(悅樂)이 훨씬 충만함을 그들이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이 소설이 (조금 과장은 있지만) 우화가 아님을 말해주기 보다는 차라리 Bach의 Goldberg Variation을 Glenn Gould의 연주로 잘 들어보도록 이야기해 주는 것도 한 방법일지는 모른다는 생각이든다.
이미 세상은 사랑 그 자체일 뿐인 것을.
*************
눈 뫼 (雪山)
- 여산 우희종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기다림이 아픔인 사람에게 삶이란 얼마나 힘든 것일까
기다림이 없는 사람에게 삶이란 얼마나 무미(無味)한 것일까.
눈 내리고 해 뜨고 바람 불어 또 다시 별이 떠도
여전히 그 자세로 기다릴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다림으로
산이 눈을 기다려
흰 눈이 내리듯
너를 기다려
이처럼 아름다운 삶이라면
산은 여전히 눈의 소리(雪聲) 들으며
그렇게 기다림의 모습으로 서 있으리라.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축복받은 일이다.
http://www.cyworld.com/zarita
한편, 이 이야기는 우화(寓話)라기 보더는 극히 사실적 소설이다. 이 소설을 우화로만 보는 이들은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아직 섹스가 무엇인지, 에로틱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이 아닐까 한다. (이 책을 읽으며 작가가 말하는 내용들이 일전에 캐나다의 Jean Benoit의 작품을 보고 썼던 에로티시즘에 대한 나의 생각과 너무 유사함에 조금 놀랐다.)
이 책에서는 섹스란 단순한 몸짓에 불과한 욕망의 만남이 아니라 존재와 존재의 만남이 될 수 있다는 진정한 섹스의 모양을 보여준다. 비록 많은 젊은이들은 서로 벗고 숨을 헐떡거리고 쾌감이 지나간 것으로 섹스를 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단지 욕망의 모습을 한 생식의 몸짓이다. 그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몸짓이 섹스라고 굳게 믿고 있으면서, 이것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향해 가는 여러 길 중의 하나일 것임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지극히 공감할 수 있는 말로써,
<섹스라는 욕망을 통해 원하는 것은 단순한 젖가슴이나 몸이 아니고 상대의 존재라는 것을 안다면 가장 큰 쾌락은 행위 자체가 아니라 행위에 담겨있는 정열이다. ...(略) 치열하게 살아가는 존재는 매순간 희열을 느낀다. 그에게는 섹스가 전혀 아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성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은 뭔가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삶의 부름에 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욕망의 몸짓에 불과한 섹스를 하면서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많은 젊은이들은 결코 존재를 향한 거의 종교에 가까운 정열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이러한 이들은 나이를 들어가면서 결혼, 가족, 그리고 사회적으로 평온한 가정이라는 이름 속에 진부해져가는 자신의 존재와 함께 평생 그 섹스 이상의 것을 알지 못하고 죽어간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사회에서 남자들이 소위 ‘영계’라 해서 어린 여자들만 좋아하는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들은 섹스도 존재가 만나는 방법 중의 하나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저 여자를 인간 이전에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는 대상이나 수단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물론 존재와 존재의 대등한 만남은 이 책에서 보여주듯 헌신적인 고통이나 섹스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싣달타는 극한 고통을 수반하는 고행을 하다가 그것이 결코 바람직한 방법이 아님을 깨닫고 자연스런 상태에서 명상을 통해 온 우주의 존재와 만날 수 있었다.
(종교 문화 속에서 고통을 통한 우주적 존재와의 합일을 시도하는 것은 책에서 언급된 중세 성직자들에서 보듯이 매우 흔한 일이다. 반드시 성적 취향으로서의 SM-sadomasochism-의 형태가 아니라도 말이다.)
하지만 단순한 욕망의 몸짓이 아닌 서로 열린 마음과 상대에 대한 존중과 집중으로 행해진 섹스로부터 개인의 지극한 자유와 평화로움을 맛보게 되는 것은 참으로 축복받은 일이다. 어쩌면 종교적으로나 얻을 수 있는 지극한 상태를 우리가 어려운 명상이나 종교적 헌신 없이 손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종교 역사상 기독교 문화에서 뿐만 아니라 탄트라 좌파불교 등, 섹스를 통해 신/진리와의 합일을 시도한 예가 매우 많다. 하지만 그러한 시도는 결과적으로 모두 실패했고 외도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섹스라는 수행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행하던 이들의 문제였음은 잘 알려져 있다. 많은 이들이 점차 섹스가 주는 쾌락을 통해 얻게 되는 자유와 평화를 찾기보다는 욕망의 만족을 주는 쾌락에 길들여져 갔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대부분 욕망의 몸짓에 길들여져 있는 이들은 이러한 섹스를 통해서 존재가 만날 수 있다는 그러한 가능성마저 지니지 않게 된다. 주위를 돌아보아도 빛을 잃어 버린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책에서는 ‘빛’이라 표현되어 있고, 현실적으로는 특정한 상대가 느낄 수 있는 성적 에너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한편, 어떠한 방법으로 경험하던 (섹스, 참선, 명상 등등) 이미 타 존재와의 합일을 경험한 이들에게 욕망의 배설로서의 구체적 몸짓은 더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사람들은 간혹 내게 묻는다. 10여년 이상 혼자 살면서 그런 문제는 어떻게 풀어 가느냐고. 참선을 통해 서로 둘이 아닌 존재의 참모습을 경험할 수 있었던 나로서는 그러한 경험이 없는 그들에게 그것을 간단히 설명해 주기가 어렵다. 간혹 설명을 해주어도 그들은 내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들 식으로 이해한다. 그들은 내가 체험한 것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코엘류는 이 부분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섹스라는 욕망을 통해 원하는 것은 단순한 젖가슴이나 몸이 아니고, 상대의 존재라는 것을 안다면 가장 큰 쾌락은 행위 자체가 아니라 행위에 담겨있는 정열이다. ... 치열하게 살아가는 존재는 매순간 희열을 느낀다. 그에게는 섹스가 전혀 아쉽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중요한 것은 행위를 넘은 그 무엇인 것이다. 소설에서는 ‘존재의 빛’, ‘존재의 만남’ 등으로 표현되어 있는 그것이다. 자신들의 욕망의 몸짓이 섹스의 전부인 줄로 알고 있는, 즉 체험해 보지 못한 이들에게 이 점이 납득되기는 어려운 일이기에 아마도 사람들은 이 11분이라는 책을 우화라고도 보는 것 같다. 이들의 '문화'에서는 이 책에서 언급된 것 같이 성기의 삽입 없이도 얼마나 충실한 섹스가 가능한지는 상상하지도 못한다.
그러한 문화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욱 단순한 몸짓에 길들여져 있고 행위 자체에 집착하여 이 여자, 저 여자 상대를 가리지 않고 탐욕스럽게 되어간다. 관계한 여자의 숫자는 계속 늘어갈지는 몰라도 이들에게는 섹스 이상의 것이란 결코 있지 않는 것이기에 그들은 존재의 소통을 결코 알지 못하고, 항상 외로운 행위일 뿐이다. 코엘류의 말처럼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지 않고 있기에 외로워하면서 욕망의 몸짓만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이 책에서 언급된 그러한 ‘빛’을 지닌 여성은 그리 흔하지 않다 (내가 남성이기에 여성만을 언급하게 된다). 이 ‘빛’은 나이나 사회적 신분, 믿고 있는 종교, 성경험의 장단 등에 전혀 상관없이 보여 지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섹스라는 단순 몸짓에 길들여져 있는 대부분의 일반인들에게서 이러한 빛을 지닌 사람을 보기는 참 어렵다.
그렇기에 섹스를 하면서 존재 간의 만남을 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그러한 이성이라면 10년을 기다려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또 그러한 기다림 속에 평생 못 만난다 해도 후회되지 않을 것이다. 코엘류의 표현대로 진정한 쾌락은 상대와의 섹스라는 행위가 아니라 행위에 담겨 있는 정열이요, 이 정열로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표현으로서는 삶 속의 기다림의 자세이다).
참선을 통한 개인적 체험 이후 지난 10여년 동안 이러한 ‘빛’을 느끼게 하는 여성을 본 것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전체적으로 말한다면 성경험이 조금은 있는 비교적 젊은 여성에서 볼 수 있다 (성을 너무 몰라도 이러한 빛은 잘 안나타난다). 간혹 드물기는 하지만 나이가 있어도 이러한 느낌을 주는 여성도 있다.
한편, 이러한 빛을 지니고 있어도 그 빛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미 단순한 몸짓으로서의 섹스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러한 행위에 멈추어있거나, 아니면 심리적으로 자신을 가두고 있는 소극적 경우가 그렇다.
섹스를 통해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얻으려면 행위에 참여한 두 사람 모두 삶에 대한 적극적 자세(책에서의 여주인공의 자세가 그렇다)와 깨어있음을 바탕으로 상대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집중으로 서로에게 자신을 열 때 가능하다.
나 자신도 참선을 통한 개인적 체험을 하지 않았다면 이 책을 우화로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의 삶이란 생물적인 섹스를 포함해 그 무엇을 하던 간에 궁극적으로 너와 나라는 존재의 만남을 향해 나아가는 것임을 알고 있기에 내가 보기에 이 책은 ‘섹스가 무엇인지 아는 이의 지극히 사실적인 이야기’에 바탕을 둔 소설이다.
이 책을 덮으면서 그동안 나에게 외롭지 않느냐, 어떻게 오랫동안 혼자 지낼 수 있느냐라고 묻던 이들에게는 그 대답으로서 미소와 더불어 밑에 남기는 나의 시(詩) 한편과 문학적으로 그리 뛰어난 작품은 아닌 뻔한 이 책을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욕망의 쾌락뿐인 가십성의 수백 번의 몸짓보다는 단 한 번의 존재의 열락(悅樂)이 훨씬 충만함을 그들이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이 소설이 (조금 과장은 있지만) 우화가 아님을 말해주기 보다는 차라리 Bach의 Goldberg Variation을 Glenn Gould의 연주로 잘 들어보도록 이야기해 주는 것도 한 방법일지는 모른다는 생각이든다.
이미 세상은 사랑 그 자체일 뿐인 것을.
*************
눈 뫼 (雪山)
- 여산 우희종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기다림이 아픔인 사람에게 삶이란 얼마나 힘든 것일까
기다림이 없는 사람에게 삶이란 얼마나 무미(無味)한 것일까.
눈 내리고 해 뜨고 바람 불어 또 다시 별이 떠도
여전히 그 자세로 기다릴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다림으로
산이 눈을 기다려
흰 눈이 내리듯
너를 기다려
이처럼 아름다운 삶이라면
산은 여전히 눈의 소리(雪聲) 들으며
그렇게 기다림의 모습으로 서 있으리라.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축복받은 일이다.
http://www.cyworld.com/zari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