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크리스마스

2005. 1. 12. 15:30 |


1. 그와 그녀의 직업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멈춰있고 싶다.
하지만 언제나 시간은 흐르기에 옛 연인은 결혼을 하고 아버지는 나이가 들어간다.
때문에 그는 사진을 찍고, 또 누군가를 기억한다. 그에게 유일한 저항이란 이런 것들.
나머지의 시간은 죽음을 준비하는데에 보낸다. 병원을 다녀오고, 발톱을 깎고, 아버지를 위한 VTR 메뉴얼을 쓴다. 그에게 있어 미래란 확대하면 할수록 징그럽게 드러나는 아메바 같은 슬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꿈틀거리지만 단순한 죽음. 그에게 남은 것은 기억과 체념뿐이다. 조용한 그.

정원의 직업으로 사진가를 설정한 것은 정원의 캐릭터, 상황과 필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사진은 현재를 과거로 만드는 작업이며 사진가는 진지한 역사가처럼 그 작업에 자신의 관점을 반영한다. 사진은 시간을 정지시키는 마술이다. 죽음을 기다리는, 아니 기다릴 수밖에 없는 정원에게 사진이란 절대적이고 전지전능한 시간에게 저항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여기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멈춰있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녀에게 있어 과거는 예닐곱 명이 모여 아이스크림 하나를 빼앗아 먹는 지긋지긋함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 마을의 멈춰있는 것들을 단속한다. 제 곳에 멈춰있지 않은 것들, 불법주차를 단속하는 것이 그녀의 일이다.
하지만 멈춤을 단속하는 그녀에겐 발 디뎌 잠시 쉴 곳 마저 없다. 그녀가 쉬려하면 그곳의 멈춤이 그녀를 배척하고 달아나기 때문이다. 마치 식당 앞에 주차된 차들처럼 말이다. 때문에 그녀는 흘러가면서도 언제나 혼자이다. 이제 그녀는 더욱 시간을 지루해 한다. 항상 피곤한 그녀.


다림의 직업 주차단속요원 역시 다림의 캐릭터, 상황과 필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지루한 시간들을 쫓아보내듯 그녀는 주차된 차들을 단속하지만, 결국엔 그녀가 의도하지 않을 때조차 차들이 그녈 피해 달아나듯, 시간 역시 그녀가 의도하지 않을 때에도 흘러간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에서 직업은 중요한 미장센이다. 허진호 감독의 또 다른 영화 <봄날은 간다>의 소리 잡는 사람 상우와 소리를 소비하는 라디오의 아나운서 겸 프로듀서 은수의 설정 역시 사랑에 대한 그들의 관점을 잘 담아내고 있다. 상우에게 있어 사랑은 찾아다니고 꼭 잡아두어야만 할 무언가이고, 은수에게 있어 사랑은 라디오 프로의 코멘트처럼 소비해버려야 할 무언가이다. 다시 <8월의 크리스마스>로 돌아가 보자.

2. 그와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


어느 날 그녀가 근처 사진관에 들렀다. 그리고 그때부터 사진관의 멈춰 있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불법 주차해 있던 시간들은 그녀를 보고는 서둘러 길을 떠난다. 그녀는 무시무시한 주차단속요원이기 때문이다.

남자는 처음으로 뜀뛰기를 시도해본다. 아직은 헉헉대며 그녀 뒤를 쫓는데에 그치지만 언젠가는 그녀와 나란히 뛰겠단 다짐도 해본다. 남기기만 했던 병원의 맛없는 밥그릇도 어느샌가 비워지기 시작한다. 과거의 연인에게 슬쩍 농담을 건낼 줄도 알게 된다. 그녀에게 두 아이가 생기고 남편이 망나니가 될 만큼 시간은 흐른 것이다. 그는 그제야 그것을 깨닫는다.

그녀도 사진관에 들어서며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녀가 맡긴 필름처럼 그녀의 삶도 인화되어 색을 띄고, 덥기만 하던 여름도 그가 틀어준 선풍기와 그가 사준 아이스크림에 선선해진다. 슬슬 패스트푸드가 지겨워져서 그에게 슬쩍 요리도 잘하냐고 물어본다. 그녀는 이제 소녀에서 여인이 되어간다.
그녀는 화장을 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시간을 멈추고 싶어하던 남자와 그것을 단속하던 여자가 만나 시간은 헝클어지기 시작한다. 여름은 겨울이 되고 죽음은 삶이 된다. 오랜만에 탄 롤러코스터가 두려움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버린다.


정원과 다림의 기호는 그들의 직업만큼이나 그들을 잘 드러낸다. 정원은 장을 봐서 음식을 하고 다림은 패스트푸드를 먹는다. 그것이 사실 그들의 기호라기보단 그들의 상황이 야기한 것이라는 점에서도 정원과 다림의 캐릭터와 필연성을 가진다. 또 영화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은 다림의 시간을 설명해주는 영화적 장치다. 또 이 아이스크림의 모티프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이스크림(여름)-낙엽(가을)-눈발(겨울)의 모티프로 변화해가면서 불가항력적인 시간의 경과를 설명해준다.

3.그와 그녀의 공간


어둠 속에서 그가 홀로 흐느껴 운다. 서서히 깊어져가는 병마와의 싸움에 그는 이를 악물고 울음으로 저항한다. 컴컴한 어둠에 휩싸인 그의 방, 그가 누워있는 이불위로 쏟아지는 한 줄기 엷은 조명과 이불의 희미한 들썩임. 아버지는 문을 열었다가 이내 다시 닫는다. 절대적 고독의 공간. 영화는 누구도 감히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그만의 공간이 있음을 말한다.

밝은 형광등 조명아래 그녀가 있다. 직장동료에게 그가 들려준 방구 낀 귀신이야기를 재잘대는 그녀. 비록 동료는 잠들었지만, 그녀는 이야기를 계속한다. 들어주지 않기에 그녀의 고독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고독은 그의 고독만큼 무겁진 않다.


공간은 영화에서 인물의 심리를 드러내는 중요한 미장센으로 작용한다. 정원이 홀로 등장하는 신은 사진관이든 그의 방이든 대부분이 어둡다. 조명 역시 한줄기 엷은 조명으로 얼굴의 일부분이나 신체의 일부분만을 비춘다. 죽음의 기운이 물씬 풍긴다. 반면에 다림이 홀로 등장하는 신은 거의 없다. 그녀는 항상 그녀의 직장동료와 함께이거나 정원과 함께 있다. 간혹 홀로 등장하는 신이 있어도 그녀는 대부분 웃고 있다. 정원과의 만남 이후 다림은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는 사랑에 둘러 쌓여있다.



그가 드디어 쓰러졌다. 이를 악물고 맛없는 병원 밥을 한 공기 다 비우는 그이지만, 그녀가 올지도 모르는 사진관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이제 카메라는 다 허물어져가는 기와지붕의 사진관을 롱샷으로 비춰준다. 프레임 귀퉁이에서 그녀가 걸어온다. 사진관 안으로 편지를 밀어 넣는 다림의 모습이 클로즈업 된다. 멈춰있는 시간 속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시간을 밀어 넣는 다림.
하지만 여전히 사진관은 그의 방처럼, 그의 죽음처럼 어둡기만 하다. 그녀는 급기야 돌을 던져 창을 부순다. 끊임없이 그의 공간으로 들어가려 하는 그녀. 이쯤되면 치열하기까지 하다.


사진관은 그의 방만큼 절대적이진 않은, 세상과 소통하려하는 정원의 공간이다. 다림이 그 공간을 방문하는 순간부터 사진관과 함께 그의 공간은 밝아진다. 하지만 정원의 병은 사진관을, 그의 공간을 닫게 만들었고 어두컴컴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시간은 다시 멈춰 서려했다. 다림은 끊임없이 자신의 시간을 밀어 넣지만 소용이 없다. 결국 다림이 돌을 던져 창을 깨는 순간 철옹성 같던 그의 공간도 깨어진다. 물론 그의 삶이 깨어지는 것도 막을 수는 없다.



그가 다시 사진관에 들렀다. 죽음 전에 단 한 번 허락된 방문. 그는 그녀의 사진을 확대인화하고, 차마 전하지 못한 편지를 살며시 보관함에 넣는다. 구구절절한 편지보단 한 장의 사진으로 그의 마음을 전하리라 결심한 것이다. 그는 이제 자신의 초상사진을 찍는다. 대형 카메라의 조리개를 조이고 필름을 끼워 넎고, 외투의 단추를 단정하게 잠근다. 렌즈를 바라보는 그의 입술이 얼마 전에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초상사진을 찍은 할머니의 입술과 닮아있다. 마지막으로 살짝 미소를 지어본다.

떨어지던 낙엽은 흩날리는 눈발로 바뀌었다. 그만큼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여전히 허름한 초원사진관엔 그가 정성들여 써내려간 매뉴얼을 읽으며 작업을 하는 아버지가 그가 타던 스쿠터를 타고 출장을 나간다. 오랜만에 사진관 앞을 지나던 그녀가 커다랗게 인화된 그녀의 사진을 발견한다. 그녀는 그의 마음을 마침내 건내받고는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초상사진을 찍기전 그의 미소와 닮은 그녀의 미소.



절대적 고독만으로 가득차있던 어두컴컴한 그의 공간은 그가 죽고 나서야 환해진다. 이제 사진관은 그만의 고독한 공간이 아니다. 그의 아버지가 그의 흔적이 담긴 물건들과 함께 사용하고, 그녀의 사진이 걸려있는,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간이다.

누구도 시간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다. 그것이 무덥기만한 복날이든, 캐롤을 들으며 한 달을 꼬박 기다린 크리스마스든, 흘러갔음을 미처 알아채기도 전에 시간은 흘러가버리는 것이다.
가끔은 끝까지, 무자비하게 말이다.
하지만 흘러갔음이 꼭 의미 없음을, 사라졌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말마따나 추억이 되지 않는 간직하고 떠날 수 있는 그런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이 삶을, 사랑을 허랑하지 않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Posted by nar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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