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

2005. 1. 12. 15:28 |
격리된 곳으로 가고 싶었어.
산이니 바다니 이런 곳들은 별 감흥이 없을 것 같더군.
그래서 섬을 골랐지.
거제도에서 배를 타면 갈 수 있는 외도엘 가려했어.
두 사람이 이십년간 가꾼 섬, 환성의 섬이라는 그곳엘 가면
세월을 견뎌낸 집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그런데 비가 조금씩 오는가 싶더니 태풍주의보가 내리더라.
배가 뜨질 않는데. 밤을 세워가며 여행 계획을 짰는데 허무하더군.
눈 아래가 벌써 거뭇해져서는 더이상 생각을 하는게 힘들더라.
그래서 동굴엘 갔어. 예전부터 한 번은 가야겠다고 생각했었거든.

처음으로 해운대 역에서 기차를 탔어. 근처에 있는데도 경부선이 아닌 탓에 한 번도 타본 적이 없었거든. 썩 괜찮은 풍경이 펼쳐졌는데도 덜그덕 거리는 기분좋은 진동에 이내 골아떨어지고 말았어. 말했잖아. 밤 샜다구.

영주에서 내렸어. 부산에서 단양으로 가는 직행열차는 하루에 하나 밖에 없거든. 그래서 영주 역에서 시외버스터미널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다시 시외버스로 갈아타고 단양으로 향했지. 또 잤어. 그렇게 한 잠자니 아저씨가 내리라며 깨우더군. 잠이 덜 깬 눈을 애써 비비며 터벅터벅 걸어나오는데 간판도 제대로 붙어있지 않은 단양 시외버스 터미널이 날 반기더라. 슬쩍 치켜든 눈에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어. 오락가락하는 비에 날은 음침하지, 사람은 없지, 혼자 여행하는 맛이 나더만. 그래도 자세히 살펴보니 음식점에 한 두명, 터미널에 너댓명 있더라. 아씨 이럴 땐 꼭 사당역 같은 곳이 생각난단 말야. 먼저 들어간 자기 다리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한 지하철 안으로 머리를 들이미는 , 조금만 떨어져서 바라보면 미친 짓이 일상이 되는 그곳.

바로 앞엔 굉장히 쓸쓸해 보이는 다리가 하나 서 있더라. 폼은 엄청 잡고 있는데 차는 거의 없었거든. 그 위를 걸었지. 옆엔 큼지막한 산맥이 쭈욱 이어져 있는데 아마 소백산 줄기였을꺼야. 그리고 아래론 산을 끼고 강이 굽이져 흐르고 있었어. 그 강에선 흰색, 노란색 비옷을 입은 사람들이 '흐르는 강물처럼'의 브래드 피트 처럼 멋지게 민물낚시를 하고 있더라구. 쏘가리 낚시인 것 같았어.
여튼 그렇게 이십여분을 걸으니 고수동굴이 나오더라. 비수기라 입구의 음식점들이 텅 비어 있었어. 입장권을 끊고 동굴 입구로 들어갔는데, 그 순간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왔던 기억이 났어. 햐. 까맣게 있고 있었는데 말야. 통로를 왕복 두 줄로 만든 것을 보고 기억이 난거였어. 수백명이 그 좁은 길을 낑낑대며 걸어가느라 정작 구경은 하나도 못 했었거든. 겨우 찍은 사진은 플래쉬 때문에 토끼눈으로 나왔고 말야. 쩝.

그렇게 기분좋게 혼자 웃고 있다가 갑자기 오싹해진 탓에 정신을 차렸지. 워낙 밖과 기온차가 나는데다 가만히 돌아보니 그 길고 긴 동굴안에 나 밖에 없더라구. 어둡고 좁은, 게다가 축축하기까지한 그 길을 혼자서 걷는데 내 발걸음 소리가 메아리로 돌아오더군. 그 소리 알지? 철로 된 계단을 밟을 때 나는 텅~ 하는... 쓸쓸하기도 하고, 약간은 무섭기도 한 소리. 그렇게 한 참을 걸었어. 종유석이니 석순이니 하는 신기한 것들이 많던데 나야 뭐 그런 거 알겠어? 그냥 멋있네 하고 걸었지.


두려움과 아늑함의 공존. 그때 상황이 그랬어. 축축하다 느꼈던 습기가 적당히 나를 감싸는데 주저앉아 버릴 만큼 아늑하더라구. 동굴 안에 있는 깊고 시커먼 무수한 구멍들은 악마가 튀어 나올 것 처럼 두려웠지만, 그곳에 들어가 웅크리고 몸을 기대면 천년만년 죽은 듯이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어. 그것도 단 한번의 꿈도 꾸지 않는, 길고 편안한 잠을... 그런 매혹의 공간을 나는 걸어갔던거야.
당연히 발걸음은 느릴 수 밖에 없었지. 이런 공간도 끝이 있는 법이니까.

그렇게 헥헥 거리며 한걸음씩 떼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어쩌면 그간 나는 삶의 추상성에 너무 많은 것을 걸고 있었던 것 아닌가 하고 말야. 난 추상적 삶이 가져다주는 비정형성을 신뢰했거든. 그런 비정형성이야말로 지리한 삶에 모험을 가능케하는 유일한 가능성이라고, 난 그렇게 생각했었어. 그런데 생각해보니 추상성과 비정형성의 관계는 그리 끈끈하지 않더라구. 마치 추상적이지만 정형적인 동굴, 또 한편으론 구체적이지만 비정형적인 동굴처럼 말야.
젠장, 내게 필요한건 구체적이지만 비정형성을 담보한 삶이었던거야. 그래, 삶의 본질 자체가 어떠하단 것과 관계없이 내가 구성할 삶의 본질이 그랬어야 하는 거라구. 자기합리화란 끈질긴 기생충이 돌연변이를 거듭하며 진화해왔는데도 나는 무력했던거지. 강한 건 내가 아니라 나의 자존심 뿐이었던거야. 아, 주체에 관한 나의 관점도 어느정도는 환상일 뿐이었군. 인정했어야 하는건데 말야. 젠장.

동굴의 끝으로 가는 여정에서 단 세사람을 만났어. 모두 안내인이었지. 뚱뚱한 덩치에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고 있는 남자, 모자를 쓰고 동굴을 살펴보는 여자, 내가 소리내며 지나가는 동안에도 내내 졸고 있었던 중년남자. 처음의 남자와 여자는 내게 뭔가를 지시하더군. 이 길로 가라 어쩌라 그런 거. 영혼의 인도자라는 헤르메스처럼 나를 어디론가로 인도하려했지만 크게 관심은 없는 것 같았어. 뭐 헤르메스에게도 각자의 삶이 있으니까. 그런데 마지막 남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더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올드 팝을 배경으로 그저 잘 뿐이었지. 미친듯이 부럽더군. 분명 그는 하데스였을거야.
하데스가 크로노스 일족을 정복하고 제우스에게 하늘을, 포세이돈에게 바다를 넘기고 자신은 음습한 지하를 차지한 것도 이렇게 편안한 잠을 위해서 였다고 생각해. 철통처럼 그를 지킨다는 케르베로스도 어딘가 깊은 구멍안으로 들어가 달콤한 잠을 자고 있음에 틀림이 없고.

하데스 옆에 잠들고픈 욕망을 뿌리치고(왜 그랬을까) 나선형의 계단을 굽이쳐 오르니 조금씩 빛이 보이더군. 포근했던 습기가 점점 후덥지근하게 변해가면서 그렇게 바깥 세상은 내게 다가오고 있었어. 그래. 내가 갔는지도 모르지만 뭐 그런거 중요하겠어? 여튼 중요하건 무지 더웠고 짜증이 났단거야. 이렇게 더운데 저 밖으로 나갈 이유가 뭔가 그런 생각이 든거지. 아케론의 강 앞에서 사공을 기다리는 망자처럼 온갖 생각이 다 스쳐지나갔어. 발거음은 더욱 느려졌고 마지막 순간엔 우뚝 멈춰섰지.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서있다 잠시 고개를 내밀어 바깥을 봤는데, 어설프게 만들어진 답답한 철제 통로 옆으로 짙은 녹색의 풀밭이 펼쳐져 있었어. 방금 전에 비를 맞은, 그래서 아직 수정같은 물방울이 맺혀있는 그런 맑은 풀들이 쭉 늘어서 있는거야. 문득 바깥엔 아직 실험해 볼 것들이 남아있단 생각이 들더군.

그래서 빠져 나왔어. 동굴을, 자궁을, 명계를, 천국을 말야.
그래. 그렇게 나온거야. 온몸에 땀을 뻘뻘 흘려가며 있는대로 인상을 찌푸린채로.

그럼 이제 시작이냐구?

글쎄.
그래도 말야. 끝은 끝이야. 시작이 아니라구  
Posted by nar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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