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나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어느 시점 이전은 소거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소거된 기억 속에는 할아버지의 죽음, 할머니, 아버지, 엄마, 그리고 나의 눈물과 상처들이 뒤범벅이 되어 아주 깊이,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때 나는 울보였다.
마음이 수용할 수 없는 억울함은 눈물이 되어 밖으로 흘렀다. 울 땐 눈물이 모든 감각기관을 장악해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입은 그저 눈물의 효과음을 뱉어낼 뿐이고, 코는 그저 눈물의 냄새를 맡을 뿐이고, 귀는 밖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말을 했어야 했다. 억울함을. 부당함을.
토해내지 못한 말들은 마음을 파고들어 동굴이 되었다. 횃불조차 없는 동굴엔 대상을 찾지못한 메아리만 음산하고 공허하게 떠다녔다. 하나의 동굴이 만들어질 때마다 나는 아팠고, 아픔은 곧 다음에 대한 불안함이 되었다. 웃음이 가득했던 저녁의 식탁에서도, 그러한 불안함은 촛불처럼 조용히 일렁였다. 아마 나를 감싸던 지속적인 사랑(그것은 억울함과 별개로 주어졌다)이 없었다면, 그때 나는 파괴되고 비뚤어졌을 것이다. 다행이도 그렇진 않았다.
그러던 나는 언제부턴가 울지 않는 아이가 되었다. 아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나이의 끝자락 즈음이었다.
아버지와 크게 싸웠던 것이다. 싸우기 위해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아야 했다. 눈물은 곧 싸움의 포기를, 동굴로의 후퇴를 의미했다. 승패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내 안의 것들을 토해낼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했다. 격렬하게 아버지의 의견에 반박하고 내 의견을 쏟아낸 후 나는 홀가분함을 느꼈고, 한편으로 매우 슬펐다. 왜 그렇게 슬펐는지 잘은 모르겠다. 단지, 그때 나는 나의 유년기가 이제는 끝났음을 알았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깊은 연민이 남았다.
그 날 이후 아버지와 크게 싸우는 일은 없었다. 난 별 말없이 그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고, 신기하게도 아무런 저항감을 느끼지 못했다. 아버지도 이제 늙었다는 생각이 들만큼, 스스로의 오류를 곧잘 인정하는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갔다. 밖에서의 술자리는 사라지고, 저녁 식탁에는 후식처럼 당신을 위한 소주 두세잔이 올라왔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술을 마셨고, 고등학생 때 부턴 집에서도 어느정도 눈치채고 있었지만, 그때까지도 아버지와 함께 잔을 기울이지 못했다. 아버지가 그러지 않았다기보단, 내가 그러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무언가 인정하기 싫은 것이 있었다. (결국 대학생이 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아버지와 술을 마셨던 것 같다)
수능이 끝나고 내 방엔 교육방송을 보던 TV와 비디오가 남았다. 나는 매일같이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 영화를 봤다. 왕가위의 영화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몇 번이고 다시 보곤 했다. 그외엔 주로 상투적인 멜로 영화가 많았다.
그리고 나는, 그날 이후 아마도 처음으로,
울었다.
한 번 울고나니 영화를 볼 때마다 눈물이 나왔다. 두터운 이불 속에 몸을 묻고, 작은 TV 앞에 앉아 밤마다 울곤 했다. 사실 크게 슬프지 않았다. 아프지도 않았다. 영화 속에서처럼 마음 깊은 곳의 상처가 마침내 터져나와 치유되는 그런 눈물이 아니었다.
그냥 눈물이었다. 조금 짭짤하고 조금 끈적한.
오히려 기뻤다. 기뻐서 눈물이 나온 것이 아니라, 눈물이 나와서 기뻤다.
얼마 후 입학시즌이 되어 나는 고향을 등지고 상경했다. 아버지는 손수 부산서 서울의 기숙사까지 나와 내 짐을 차에 실어 날라 주었다. 짐을 정리하고 근처에서 밥을 먹고, 저녁에 아버지는 부산으로 돌아갔다. 아버지와 헤어지고 기숙사의 내 방으로 터벅터벅 걸어들어면서, 나는 아무런 아쉬움도 미련도 느끼지 않았다. 그 후 일년간 집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고, 오직 의무적으로 가끔씩 안부전화를 했다. 좋다 싫다가 아니라 그저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를 발견하고 변화하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빴다.
그러다 어느순간부터 아버지란 사람도 그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화를 해서 목소리를 듣고나면 일종의 안도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후론 시간이 남을 땐 곧잘 전화를 하게 되었다. 대화 내용은 컴퓨터가 고장났다는 둥, 엄마와 낚시를 갔는데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는 둥, 뭐 필요한 거 없냐는 둥 하는 시시콜콜한 내용이 전부지만 그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와 나의 관계는.
그리고 눈물은.
여전히 나는 나와 내 관계들에서 눈물을 흘리지 못하고, 영화 따위를 보며 찔끔 눈물을 흘릴 뿐이다. 어째 수능을 치루고 난 그즈음에서부터 크게 발전이 없다. 그래서 가끔은 눈물에 욕구불만인 상태가 되곤한다. 그럴때마다 나는, 어느정도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스스로를 달랜다. 눈물과 바꿔서 얻은 무언가가 있는거고, 그 무언가가 소중한 만큼 잃어버린 눈물에 아쉬워해선 안될 것이다.
지금은 말라버린 우물이지만, 상처받고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조금씩 조금씩 물이 차올라 언젠가는 다시 한바가지 가득 눈물을 길어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어느 시점 이전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한 자도 쓰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소거된 기억 속에는 할아버지의 죽음, 할머니, 아버지, 엄마, 그리고 나의 눈물과 상처들이 뒤범벅이 되어 아주 깊이,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때 나는 울보였다.
마음이 수용할 수 없는 억울함은 눈물이 되어 밖으로 흘렀다. 울 땐 눈물이 모든 감각기관을 장악해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입은 그저 눈물의 효과음을 뱉어낼 뿐이고, 코는 그저 눈물의 냄새를 맡을 뿐이고, 귀는 밖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말을 했어야 했다. 억울함을. 부당함을.
토해내지 못한 말들은 마음을 파고들어 동굴이 되었다. 횃불조차 없는 동굴엔 대상을 찾지못한 메아리만 음산하고 공허하게 떠다녔다. 하나의 동굴이 만들어질 때마다 나는 아팠고, 아픔은 곧 다음에 대한 불안함이 되었다. 웃음이 가득했던 저녁의 식탁에서도, 그러한 불안함은 촛불처럼 조용히 일렁였다. 아마 나를 감싸던 지속적인 사랑(그것은 억울함과 별개로 주어졌다)이 없었다면, 그때 나는 파괴되고 비뚤어졌을 것이다. 다행이도 그렇진 않았다.
그러던 나는 언제부턴가 울지 않는 아이가 되었다. 아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나이의 끝자락 즈음이었다.
아버지와 크게 싸웠던 것이다. 싸우기 위해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아야 했다. 눈물은 곧 싸움의 포기를, 동굴로의 후퇴를 의미했다. 승패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내 안의 것들을 토해낼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했다. 격렬하게 아버지의 의견에 반박하고 내 의견을 쏟아낸 후 나는 홀가분함을 느꼈고, 한편으로 매우 슬펐다. 왜 그렇게 슬펐는지 잘은 모르겠다. 단지, 그때 나는 나의 유년기가 이제는 끝났음을 알았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깊은 연민이 남았다.
그 날 이후 아버지와 크게 싸우는 일은 없었다. 난 별 말없이 그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고, 신기하게도 아무런 저항감을 느끼지 못했다. 아버지도 이제 늙었다는 생각이 들만큼, 스스로의 오류를 곧잘 인정하는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갔다. 밖에서의 술자리는 사라지고, 저녁 식탁에는 후식처럼 당신을 위한 소주 두세잔이 올라왔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술을 마셨고, 고등학생 때 부턴 집에서도 어느정도 눈치채고 있었지만, 그때까지도 아버지와 함께 잔을 기울이지 못했다. 아버지가 그러지 않았다기보단, 내가 그러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무언가 인정하기 싫은 것이 있었다. (결국 대학생이 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아버지와 술을 마셨던 것 같다)
수능이 끝나고 내 방엔 교육방송을 보던 TV와 비디오가 남았다. 나는 매일같이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 영화를 봤다. 왕가위의 영화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몇 번이고 다시 보곤 했다. 그외엔 주로 상투적인 멜로 영화가 많았다.
그리고 나는, 그날 이후 아마도 처음으로,
울었다.
한 번 울고나니 영화를 볼 때마다 눈물이 나왔다. 두터운 이불 속에 몸을 묻고, 작은 TV 앞에 앉아 밤마다 울곤 했다. 사실 크게 슬프지 않았다. 아프지도 않았다. 영화 속에서처럼 마음 깊은 곳의 상처가 마침내 터져나와 치유되는 그런 눈물이 아니었다.
그냥 눈물이었다. 조금 짭짤하고 조금 끈적한.
오히려 기뻤다. 기뻐서 눈물이 나온 것이 아니라, 눈물이 나와서 기뻤다.
얼마 후 입학시즌이 되어 나는 고향을 등지고 상경했다. 아버지는 손수 부산서 서울의 기숙사까지 나와 내 짐을 차에 실어 날라 주었다. 짐을 정리하고 근처에서 밥을 먹고, 저녁에 아버지는 부산으로 돌아갔다. 아버지와 헤어지고 기숙사의 내 방으로 터벅터벅 걸어들어면서, 나는 아무런 아쉬움도 미련도 느끼지 않았다. 그 후 일년간 집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고, 오직 의무적으로 가끔씩 안부전화를 했다. 좋다 싫다가 아니라 그저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를 발견하고 변화하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빴다.
그러다 어느순간부터 아버지란 사람도 그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화를 해서 목소리를 듣고나면 일종의 안도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후론 시간이 남을 땐 곧잘 전화를 하게 되었다. 대화 내용은 컴퓨터가 고장났다는 둥, 엄마와 낚시를 갔는데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는 둥, 뭐 필요한 거 없냐는 둥 하는 시시콜콜한 내용이 전부지만 그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와 나의 관계는.
그리고 눈물은.
여전히 나는 나와 내 관계들에서 눈물을 흘리지 못하고, 영화 따위를 보며 찔끔 눈물을 흘릴 뿐이다. 어째 수능을 치루고 난 그즈음에서부터 크게 발전이 없다. 그래서 가끔은 눈물에 욕구불만인 상태가 되곤한다. 그럴때마다 나는, 어느정도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스스로를 달랜다. 눈물과 바꿔서 얻은 무언가가 있는거고, 그 무언가가 소중한 만큼 잃어버린 눈물에 아쉬워해선 안될 것이다.
지금은 말라버린 우물이지만, 상처받고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조금씩 조금씩 물이 차올라 언젠가는 다시 한바가지 가득 눈물을 길어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어느 시점 이전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한 자도 쓰지 못하고 말았다